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말러는 오케스트라 시즌이 끝나자마자 여름 별장을 찾아 작곡에 전념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
애석하게도 여기서 이야기가 갑자기 도약하는데, 직장인으로 살면서 작가로 글을 쓰는, ‘휴가 동안의 나’에 대한 판타지가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내가 간과한 것은 말러의 휴가가 두 달여였으며 나에게는 오스트리아 호숫가에 새로 지은 별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내가 말러가 아닌데! (절규)
-이다혜, '호텔' <17쪽>
개운하게 마감을 하지 못하는 시간을 길게 보내며 내가 호텔을 마감의 전당으로 삼은 이유가 구스타프 말러였다는 사실도 가뭇없이 잊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쪼개 살아야 하는 사람은 공간을 바꾸는 방식으로 시간을 만들어낸다. 마감을 못하는 사람은 도움이 될 것 같은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끌어다 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 아무거나 믿어버린다. 내게 중요한 것은 구스타프 말러도 호텔도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쓴 많은 글을 그 둘에 빚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다혜, '호텔' <21쪽>
작업실에 출근해 이야기의 실마리를 단 한 줄도 풀지 못하고 썼다 지웠다만 반복한다. 아무 성과 없이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진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내 작업실은 내 직업의 작업장이자 전쟁터와도 같다. 그리고 내 현 상황을 대변하는 나의 내면 그 자체이기도 하다. 순전한 나의 공간이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두서없이 널브러져 있는 나의 내면.
-연상호, '작업실' <26쪽>
쓰게 되는 글보다 써야 하는 글이 조금씩 쌓여 늘어갈 때마다 나는 반드시 누웠다. 잠에 들지 못해도 정신은 꼭 도망가 있는 채로 몇 시간씩 누워 있다가 일어나면,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일어날 수 없을 때에도 나는 쓸 수 있었다. 온 마음을 다해. 무언가가 쓰여지지 않고 있더라도 어떤 것은 반드시 내 안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박참새, '침대' <37쪽>
결국 나는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침대에 누워 잠만 자는 인간으로 퇴화해버렸다. 시체는 좀 그렇고 좀비처럼, 그냥 잠도 아니고 폭면을 취했다. 처음에는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움직이면 다 돈이고 글 써서 많이 버는 것도 아닌데 폭면도 나름 절약의 요령이 아닐까?
그런 나날이 쌓여가자 정신이 집의 인력에 서서히 잠식되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기는커녕 침대에서 일어날 수 조차 없었다. 끼니를 거르기도 일쑤였다. 나빠진 정신 건강이 족쇄로 작용하면서 육체 건강도 내리막길을 꾸준히 걷기 시작했다.
(...)
움직여야 했다. 무엇이든 변화를 찾아야만 했다.
-이용재, '뜨개 카페 귀퉁이 자리' <66쪽>
이제 뜨개는 나의 불도저다. 머릿속 온갖 잡생각의 돌멩이며 때로 넘기 버거운 감정의 산과 물을 싹 밀고 메워 곧고 탄탄한 평지로 만들어준다. 한 코 한 코마다 불도저가 앞으로 나아가며 땅을 닦아주면 나는 그 위로 생각의 씨를 뿌린다.
-이용재, '뜨개 카페 귀퉁이 자리' <71쪽>
샤워 부스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고는 꼭 생산적인 것만은 아니다. 단순히 내일의 식사 메뉴를 고민하거나, 주말에 할 일 목록을 정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은 결국 내 삶을 구성하는 작은 조각들이다. 샤워라는 의식은 이런 조각들을 연결하고 조화롭게 배치하는 과정이다.
- 정승민, '샤워 부스' <143쪽>
『영감의 공간』
김겨울, 미깡, 민혜원, 박참새, 박활성, 백지혜, 신동헌, 안은별, 연상호, 원도, 윤이나, 이다혜, 이용재, 임진아, 정승민, 최재혁, 하완, 하현, 홍인혜(루나), 황의정 지음
| 세미콜론 펴냄 | 224쪽 | 17,000원
[정리=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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