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국내 과학현장을 발로 뛰는 지식인미나니(이민환)는 최근 대전을 찾았다. 연구원이라고 하면 전형적인 사무실 풍경을 생각할 것이다. 예상과 달리, 필자는 지하 120m에 달하는 동굴로 향했다.
연구용 승강기 문이 닫히자 몇 초 만에 체감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취재를 도왔던 관계자는 "웬만해선 18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자 그간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지하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콘크리트 벽에다 센서가 얽힌 복도, 지하수가 떨어지는 천장까지, 낯선 세계의 풍경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체감온도 4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시원한 온도를 유지하는 이곳은 바로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지하처분연구시설(KURT·Korea Underground Research Tunnel)'이다. 방사성폐기물을 10만 년 넘게 가둬둘 수 있을지를 시험하는 '지하동굴'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총길이 500미터 지하에다 사용후핵연료를 영구 격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500m 처분장을 열지 못했다. 충분한 실증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97년 ‘중·장기 원자력 연구개발’ 계획을 세우고, 심층처분 기술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저장할 방법을 찾기 위해 2002년 대전 KURT가 지어진 것이다. 동굴의 총길이는 551m, 최대 심도 120m에 이른다. 이곳에서 연구진은 열·물·힘·화학 등 네 요소(THMC)가 실제 환경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직접 측정하고 있다.
연구 공간이 부족해지자 2015년 터널을 확장했고, 2012년에는 국제원자력기구 공식 지하연구시설로 등록됐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처분성능실증연구부 권장순 부장은 "10만 년 동안의 안전을 서류로만 증명하기 어렵다"라며 "그래서 암반 속에서 직접 THMC 반응을 재현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연구원들은 어떤 연구를 수행하고 있을까. 사용후핵연료는 처분 뒤에도 붕괴열을 방출한다. 열이 암반에 전해지면 암석은 팽창하고, 응력이 재분배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진은 지름 86cm 시추공에 전기 히터를 설치해 5년 동안 장기 가열 시험을 수행했다.
초기 몇 주간 미세 균열이 생겼지만 이후 성장률은 0에 수렴했다고 한다. 화강암이 예상보다 강인했고, 벤토나이트 완충재가 열을 분산하며 암반 팽창을 흡수했다. 연구진은 설계온도 100도를 130도, 175도까지 높여도 제어 가능하다고 봤다.
남궁선희 박사는 “화강암 자체가 강력한 천연 방벽임을 데이터로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처분 용기도 지하 500m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한다. 구조는 두 겹으로 설계됐고, 내부는 주철로 제작됐다. 주철은 강도가 높아 외부 암반 압력과 충격에도 견딜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내부에 사용후핵연료 집합체를 넣고, 볼트로 뚜껑을 단단히 고정한다.
한국 연구진은 와이어-아크 적층(3D 프린팅)·콜드스프레이 등으로 3cm 이하로 얇게 만드는 공법을 시험 중이다. 로봇팔이 주철 파이프에 구리 비드를 겹겹이 쌓는 장면은 마치 SF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하다.
구조지질학자 박경호 박사는 화강암 본암(약 1억 8000만 년)과 암맥·단층대(7000만 년 전)를 연대 측정해 “20만 년은 암반에게 짧은 시간”임을 강조했다. 지표 강우 압력은 150m 깊이까지만 전해지며, 빗물이 실제로 100 m까지 내려가는 데 약 5000년이 걸린다는 지하수 연대 분석도 제시했다.
한국은 미국식 경수로와 캐나다식 중수로를 모두 운용한다. 사용후핵연료 집합체 형태가 달라 용기 설계도 복수로 진행 중이다. 이처럼 국내 연구진은 매일 심도 깊은 연구를 진행 중이다. 다만 연구 진행 과정에서 어려움도 있다고 한다. 엔지니어링보다 각 원전 사업자의 정보 공유가 더 어렵다는 것.
참고로 KURT에는 실제 폐기물을 묻지 않는다. 정부는 2030년대 초까지 후보지를 선정해 500m 처분장을 착공할 계획이다. 핀란드·스웨덴과 공동 실험을 진행 중인 홍창호 박사는 "물리 법칙은 세계 어디서나 같다. 데이터를 나눌수록 안전 여유가 커진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KURT의 터널에서 측정되는 모든 숫자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는 점을 느꼈다. 또한 미래를 지키기 위한 과학자들의 약속이라는 점도 절감했다. 깊은 터널에서 시작된 작은 실험들이 ‘안전한 지구’를 만든 첫 걸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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