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여름은 이제 ‘덥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혹독하다. 숨이 턱 막히는 찜통더위와 열대야가 이어지면 입맛도 사라지고 무기력함이 일상처럼 따라붙는다. 하지만 같은 태양 아래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에 맞서는 자신들만의 ‘여름 음식’을 만들어왔다. 그들의 식탁을 따라가며, 우리는 어떻게 더위를 이겨내고 삶의 활력을 되찾는지 알아볼 수 있다.
열대의 향기, 동남아의 매콤·상큼한 여름 요리
태국 왕실에서 거리 음식으로 대중화된 ‘똠양꿍(Tom Yum Goong)’은 레몬그라스, 라임잎, 갈랑가, 고추 등 향신료가 어우러진 태국의 대표 음식인 새우 수프다. ‘똠’은 끓이다, ‘얌’은 섞다를 뜻하며, 이름 자체가 조리 과정을 설명한다. 이 요리는 19세기 라마 5세 시대에 태국 왕실의 연회 음식으로 인기를 끌었고 이후 거리 음식으로까지 퍼졌다.
냉방시설이 없던 시대 태국 사람들은 이 국물로 땀을 내어 체온을 자연스럽게 낮췄다. 실제로 똠얌꿍에 들어가는 고추의 캡사이신 성분은 땀을 유도하고 대사를 촉진한다. 이처럼 뜨거운 국물이 오히려 더위를 이기는 방법이 되는 것은 동남아의 기후에서 생겨난 식생활의 지혜다.
베트남 거리의 '여름철 한 그릇 음식'인 ‘분짜(Bún chả)’는 하노이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다. 쌀국수인 ‘분’과 구운 돼지고기 ‘짜’를 새콤달콤한 누억맘 소스에 담가 먹는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도 하노이 방문 시 이 요리를 먹어 유명해졌다.
과거 하노이 시민들은 무더위에 지친 오후, 외부 조리 없이 쉽게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이 음식으로 여름을 버텼다. 민트, 고수, 라임 등 상큼한 향신채들은 단순한 향을 넘어 위생적 방어막 역할도 했다. 허브의 향은 벌레를 쫓고, 살균 효과를 주어 더운 기후에서 식중독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중해의 청량함, 오일과 허브의 여름 기술
그리스의 요구르트 소스 ‘차지키(Tzatziki)’는 고대 그리스 병사들이 여름 전투 중에도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개발한 보존식에서 유래되었다. 신선한 요구르트에 마늘과 오이, 딜 허브를 섞어 차갑게 즐기며 더위를 피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음식이 실크로드를 따라 터키와 이란 등 중동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각국의 버전으로 재해석되었다는 것이다. 터키의 '자즈크(Cacık)', 이란의 '마스트 오 키아르(Mast-o-Khiar)' 등은 이 그리스 음식의 변형이다. 동서양의 교차점에서 음식도 문화처럼 흘러갔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샐러드인 ‘
카프레제 샐러드(Caprese Salad)’는 모차렐라 치즈(흰색), 토마토(빨강), 바질(초록)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이탈리아 국기의 세 색상과 똑같다. 실제로 1920년대 무솔리니 정권 시절, ‘국가주의 음식’으로 장려되며 공식 메뉴로 채택되기도 했다.하지만 원래 이 샐러드는 이탈리아 남부 카프리섬에서 노동자들이 더위를 피해 간단히 만들어 먹던 간식이었다. 신선한 식재료에 소금과 올리브오일만 뿌리는 단순한 방식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도 가능했던 조리법이었다. 지중해의 햇살 아래, 식재료의 맛만으로 여름을 즐기는 법을 이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냉기 속의 열정, 북방의 시원한 여름 별미
‘흐로드니크(Chłodnik)’는 동유럽에서 여름철에 즐겨 먹는 차가운 비트 수프다. 특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널리 퍼져 있으며, 비트의 선홍빛이 인상적인 음식이다.
16세기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 궁중에서는 귀족들이 여름 연회에서 이 수프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비트는 당시 부유층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뿌리채소였으며, 요구르트나 사워크림을 함께 넣은 방식은 고급 요리의 상징이었다. 반면 농민들은 흐로드니크를 우유나 버터밀크로 대체해 마시며 더위를 견뎠다. 특히 고온다습한 여름철에는 발효유가 위생적이며 소화가 잘되기 때문에, 전염병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라블락스(Gravlax)’는 연어를 소금, 설탕, 딜에 절여 만든 북유럽 전통 음식으로, 원래는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 바이킹들이 고기를 땅에 묻어(grav) 발효시키는 방식에서 유래되었다.
13세기경 스칸디나비아의 어부들은 연어를 잡아 소금으로 절인 뒤 해안 근처 모래밭에 묻고 바위로 눌러 발효시켰다. 이 방식은 장거리 항해에 적합했고, 특히 한여름 햇빛이 길고 상하기 쉬운 날에도 안전한 보존이 가능했다. 현대에는 땅에 묻지 않고 냉장 숙성으로 대체되었지만, 이 음식은 여전히 여름철 북유럽 식탁의 대표 메뉴로 사랑받는다.
여름이 되면 우리는 종종 더위를 피하려고만 한다. 에어컨, 아이스커피, 냉면에만 의지하다 보면 오히려 기운이 빠지고 허기가 늘어난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여름 음식은 단순히 ‘시원함’을 넘어 몸과 마음의 균형을 되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매콤한 향신료로 땀을 흘리고, 상큼한 허브로 입맛을 되살리며, 냉기 가득한 요리로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혜롭게 여름을 살아내는 방식일지 모른다. 올여름엔, 각국의 여름 음식에서 영감을 받아 나만의 ‘여름 생존 음식’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여성경제신문 전지영 푸드칼럼니스트 foodnetwor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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