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옷

셰프의 옷

엘르 2018-12-16 09:00:00 신고

아무 옷이나 입지 않는다. 위험하고 변수 많은 상황 속에서 일하는 셰프도 창의적인 옷이 필요하다

븟의 더블 버튼 블레이저.

븟의 데님 셰프 재킷.

한차례 불어닥친 먹방 열풍에 요리사들은 어느 때보다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요리사라는 직업을 선망하며, 명칭 또한 ‘셰프’로 격상돼 불린다. 교육부가 지난해에 발표한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선호하는 직업 순위 4위와 5위가 요리사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에 비친 셰프들은 그들 위로 쏟아지는 조명을 받으며 주어진 시간과 재료를 활용해 높은 수준의 화려한 요리를 만들어낸다. 그 모습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주어진 재료로 새로운 차원의 요리를 만드는 창의성, 여러 변수에도 최상의 맛을 이끌어내는 집중력을 요하는 요리사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그들이 일하는 환경은 드높은 위상을 받쳐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요리사는 일평균 12시간 근무하며, 주 5일 일하는 경우가 드문 데다 여전히 박봉에 시달린다. 그들이 하루에 반나절을 머무는 주방 환경은 더 심각하다. 화구와 오븐이 몰려 있는 주방은 열기로 가득하고, 달궈진 쇳덩이나 마찬가지인 프라이팬과 냄비가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그 속에서 뜨거운 물과 기름이 출렁댄다. 자칫 손목을 삐끗했다가는 그 불덩이가 요리사를 덮칠지도 모른다. 한편, 지난 정권 때 환경부는 생선을 구울 때 발생하는 초미세 먼지 농도를 공개한 바 있다. 물론 생활오염원이 미세 먼지의 궁극적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매일 고기와 생선을 구우며 발생하는 연기를 들이마시는 요리사의 폐가 온전한지 새삼 걱정됐다. 또 날카로운 칼과 가위는 언제 요리사를 향할지 모르는 위험 요소다. 실제로 요리사는 손해보험사가 지정한 사고위험도가 높은 직업군 2급에 속한다. 소방관과 경찰은 최고 급수인 3급에 해당한다. 소방관은 방화복을, 경찰은 방탄복을 입는가 하면, 요리사는 조리복을 걸친다. 헌데 불과 칼의 위협에 노출된 요리사의 조리복은 방화복, 방탄복과 비교하면 너무나 단출하다. 통 넓은 하의에 화이트 더블 재킷 상의가 전부다. 화구가 상체에 가깝고, 대부분의 조리 활동이 손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조리복 상의 착용에 더욱 엄격해졌다. 최근에는 색이 다양해졌지만, 그럼에도 열에 아홉은 화이트 더블 재킷 상의를 착용한다. 이유는 의사나 이발사처럼 피가 발생했을 때 발원지를 신속하게 찾는 한편, 열기를 흡수하기보다 방출하게 하기 위해서다. 얼룩이 져도 표백이 가능하며 주방의 청결도를 보여주는 척도라는 점은 부수적 이유에 해당한다. 또 더블 재킷인 이유는 가슴 부위를 두 겹으로 감싸 뜨거운 기름이나 물로부터 이중으로 몸을 보호하고, 한쪽 면이 얼룩질 경우 안면을 바깥 면으로 교체하여 청결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 화재 위험에 노출되며 열사병을 걱정해야 하는 요리사의 조리복을 단순한 옷이 아닌 보호복으로 인식하고 만드는 이들이 있다. 국내에 고급 조리복 시장을 연 ‘븟(Beut)’은 직원 대부분이 요리사 출신이다. 요리사로서 용광로 같은 주방을 다년간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조리복이 갖춰야 할 덕목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유럽과 미국의 유명 주방에서 경력을 쌓은 배건웅 대표가 조리복 시장에 뛰어든 이유는 개인 사정에 시장의 요구가 부합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근무한 레스토랑은 조리복에 전혀 투자해 주지 않았어요. 차마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을 수 없어 요리사끼리 돈을 모아 당시 가장 고급으로 통하던 한 미국 브랜드의 조리복을 공동 구매했죠. 그런데 기대와 달리 너무 불편했어요.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배 대표는 요리사 시절 재미 삼아 조리복을 만든 기억을 끄집어냈다. ‘자신만의 조리복을 갖는 일은 모든 셰프의 꿈’이라고 귀띔하는 배 대표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며 사귄 디자이너 친구들이 많았다. 조리복을 입으며 아쉬웠던 점들을 보완해서 완성한 도안을 친구들이 검수해 준 덕에 배 대표는 자신만의 조리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고가 그를 덮쳤고, 그는 더 이상 요리를 할 수 없게 됐다. 그때 그의 손에 쥐어진 유일한 희망이 바로 조리복이었다. “요리사 출신이니 누구보다 필요한 기능을 잘 알고 있어요. 좋은 식재료로 최상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철학이 몸에 밴 만큼 좋은 원단으로 최상의 조리복을 만들 자신이 있었죠.” 븟은 국내 최초로 조리복에 메시 소재를 차용했다. 이는 더운 주방에서 땀과 열을 최대한 빨리 배출하기 위해서다. 븟의 조리복은 언뜻 외출복을 연상시킬 만큼 멋스러운 동시에 그 속에 현장의 경험을 반영한 다양한 기능이 숨어 있다. 일반 재킷보다 긴 소매는 뜨거운 물과 기름으로부터 팔을 보호하는 한편, 급하게 뜨거운 물건을 집어야 할 때 주방 장갑을 대신할 수 있다. 또 뒷판의 기장을 길게 해 주방에서 가장 많이 쓸리는 엉덩이를 보호하며, 몸을 숙이더라도 속살이 보이지 않는다. 뜨거운 물과 기름이 덮쳤을 때 단번에 벗을 수 있도록 단추 대신 스냅 버튼을 사용했으며, 이 또한 논알레르기 제품을 선택해 금속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을 배려했다. 위로 봉긋하게 솟아 거추장스럽던 기존의 조리 모자를 헌팅캡으로 바꾼 것도 븟이다. 현재 국내에 여성을 위한 조리복은 없다. 대부분 남녀 공용을 주장하지만, 그중 실제로 여성을 배려한 제품은 찾기 힘들다. 븟은 손해를 감수하며 연구 개발한 여성용 조리복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는 주방 내 성평등을 해소하는 작은 불씨가 되지 않을까.
븟은 조리복이 작업복의 의미를 넘어 직업으로서 요리사의 격을 높이고 돋보이게 하는 패션 아이템이 되기를 바란다. <미슐랭 가이드> 2스타의 권숙수와 협업해서 만든 조리복이 그들의 이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우리 땅에서 나는 특별한 식재료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한식을 선보이는 권숙수와 완성한 조리복은 한복을 현대식 조리 공간에 맞게 재해석했다. 특히 오프 화이트와 쿨 그레이 컬러를 배색한 옷깃과 소매 끝은 한옥의 기와가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븟은 일상복과 조리복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데님과 코듀로이 소재를 활용하기도 한다. 고도의 기능성에 동양미가 더해지자 최근 해외 <미슐랭 가이드> 셰프들이 직접 주문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레스토랑은 손님을 끌기 위해 인테리어에 많은 공과 돈을 쏟는다. 그 뒤에서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는 요리사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기능성과 디자인을 갖춘 고급 조리복의 등장은 요리사들의 복지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서서히 개선점을 찾아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반가운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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