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스톰 - 무협과 판타지의 짬뽕 스톰이 몰려온다

레드스톰 - 무협과 판타지의 짬뽕 스톰이 몰려온다

웹툰가이드 2019-03-24 13:00:00 신고

 

 

 

무협지를 좋아하시는가?  판타지를 좋아하시는가?  

 
취향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지금의 10대 20대는 우리 40대 50대들 보다 무협보다는 '판타지(Fantasy)'라는 쟝르에 더 익숙하다.  우리의 아들/딸은 소림사, 남궁세가, 팽가, 당가, 종남파, 해남파의 내공 고수가 등장하는 무림의 세계보다 마법사와 기사, 용병이 '마나(Mana)'를 조작하고 용, 난장이, 엘프족과 친구가되거나 싸우면서 전투를 해 나가는 판타지에 꽂혀(?)있다.  최근에 유행하는 PC나 모바일 게임의 대부분도 이런 판타지 쟝르다. 유명한 리니지, 블레이드, 뮤 등 대부분의 게임이 판타지 게임이다.   
 
이런 무협과 판타지는 한국에서 조금의 변형을 일으킨다.  무림의 고수가 판타지의 세계로 떨어지거나,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이 무협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우가 그것이다. 즉 무협 + 판타지다.  최근 소비자의 취향에 맞게 무림의 세계에서 판타지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작품은 <묵향>이다.  1999년 PC통신에서 연재가 시작된 이래로 아직도 나오고 있는 전동조씨의 묵향은 우리나라 판타지 소설의 정점을 찍고 있는 작품이다. (시간적 여유와 기회가 되시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린다.  한달은 족히 못 빠져 나오실 것이다. ^^)
 
오늘은 다음 웹툰에서 연재하는 가장 유명한 판타지 웹툰 <레드스톰(Red Storm)>을 소개해 드리려고 한다.
레드스톰의 스토리는 무협과 판타지가 일부 섞여 있는 전형적인 한국형 판타지이다. 무림에서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정도로 무공을 연마한 마교의 교주가 우화등선한다.  그러다가 등선이 아니라 여래의 뜻으로 이계로 떨어지게 되고, 판타지의 세계에서 균형의 조절자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주인공은 사막 부족 중 하나인 파레이아족의 족장(그로우; glow)의 어린 아들 율리안이다.  마교의 교주는 우연히 이 어린 율리안의 스승이되고 율리안에게 마교의 무공을 전수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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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게 항상 수탈당하는 사막부족의 처지에 분노하는 율리안은 제국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사막의 부족들을 통합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레드스톰(Red Storm)'이라는 무적의 부대를 만든다.  <레드스톰>은 율리안이 역경을 헤쳐나가면서 꿈을 이루어 나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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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스톰>을 한마디로 말하면 '칭기즈칸 판타지버젼'이다.  머 특별할 것이 없는 스토리다.  어떻게 보면 너무 식상하다. 
 
판타지 쟝르에서 나름 이름을 쌓은 노경찬 작가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한 이 웹툰은 이상하게 재밌다.  이 뻔한 칭기즈칸 판타지 스토리를 기반으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눈을 뗄 수 없다.   웹툰<레드스톰>은 노경찬 작가의 이전 판타지소설 <레드스톰>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상당부분 디테일을 살렸다.   똑같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디테일의 힘이 그 작품 전반적인 퀄리티를 좌우한다.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새로운 협업(collaboration)이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말 너무 뻔한데 너무 재밌다. 
 
컬러로 진행할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림의 퀄리티를 유지하는 작가의 작화와 연출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인물들의 감정선과 갈등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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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의 가장 큰 효과는 힐링(Healing)이다.  현실에서 좌절한 개인들의 욕구를 대리만족시켜주는 것이다. 단지 그 시간만이라도 그 세계에 빠져서 많은 것들을 잊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그 소임을 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개인적으로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을 비난하거나 폄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외국의 판타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은 명작이고 우리나라의 <레드스톰>은 졸작인가?  그리고 골프나 자전거를 타고 인문서적을 읽는 것은 우아한 힐링인 것인가?  큰 관점에서 보면 목적성에 있어서는 다 유사하다.  어떤 취미든지 과하지만 않다면 순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휴가가 다가오고 있다. 이번 휴가 때 멀리 가지 않으시고 판타지 쟝르를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으신 분에게 <레드스톰>을 추천드린다.
 
판타지 버젼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맛보실 수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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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태양의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레드스톰> 모바일 게임도 나와있다.
 
 
[참고자료]
 
판타지소설  - 꼭! 읽어보세요~~
철학자 이정우는 “상상을 동원해 현실과는 다른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을 ‘판타지’라고 한다. 오늘날은 판타지의 전성시대다. 왜일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대중들의 심리와 그 심리를 파고들어 이익을 남기려는 자본주의, 그리고 이 두 존재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와 대중문화의 뒷받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판타지에 대한 열광은 대학 도서관에서 먼저 나타났다. 2005년 4월 『동아일보』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부산대, 경북대 등 전국의 14개 대학에서 2000~2004년 5년간 대학 도서관의 도서 대출 순위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최다 대출 도서 20위 가운데 19권이 소설이었으며, 특히 판타지 무협 추리소설이 13권인 것으로 나타났다.

14개 대학의 도서 대출 횟수를 종합한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인터넷에 연재돼 폭발적 인기를 모았던 전동조의 판타지소설 『묵향』이었다. 이 기사는 전동조가 자신의 책에서 “내 책은 지명이나 인명 따위를 외우느라 앞쪽을 다시 뒤질 필요가 없도록 쓰였다”라고 한 말은 최근 대학생의 독서 성향을 함축적으로 나타내 준다고 말했다. 판타지소설의 마니아라는 연세대 경영학과 3학년 김모씨는 “영상 세대에겐 다양한 캐릭터와 빠른 전개가 특징인 판타지소설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며 “상대적으로 문장을 여러 차례 곱씹어 읽어야 하는 인문서적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판타지소설은 그 직전에 인기를 끌었던 무협지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무협지는 ‘동양의 판타지소설’이기 때문이다. 1996년 연세대 도서관의 대출 순위 20위 안에 무협지가 12권이나 들어갔을 정도로 무협지는 대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김지룡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이는 연세대 도서관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다른 대학을 조사해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한국의 대학생들은 왜 무협지에 사족을 못 쓰는가? ······ 한국의 젊은이가 무협지를 탐닉하는 것은 탓할 일이 못 된다. 비록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무협지는 한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무협지의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칼싸움 잘하는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드문 편에 속한다. 실력보다는 가문이나 출신이 더 중요하다. 아니면 모략이라도 뛰어나든지. 무림 십걸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김지룡은 무협지의 ‘힐링’ 기능에도 주목했다. 그는 “PC 통신을 들여다보면 10대 청소년들이 사회에 대해 느끼는 분노가 무척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대학생이 되면 분노의 강도가 약해진다. 그러다가 사회에 나오면 오히려 담담해진다. 모든 부당한 일과 부정부패와 비리에 일일이 분노한다면 하루 종일 화를 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순애보와 누아르는 일종의 힐링(healing) 상품이다. 힐링은 병을 치유한다는 뜻이다. 전자 오락 게임에선 싸움에 지치고 상처를 입은 주인공을 회복시켜 주는 마법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힐링’은 이제 게임의 세계를 벗어나 현대 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키워드가 되었다.”

수많은 ‘힐링 상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무협지와 판타지소설이다. 무협지는 90년대 후반 들어 영상매체의 확장과 무협지적 요소를 차용한 대중적 판타지소설의 강세 속에 쇠퇴 징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판타지소설은 98년 이영도의 『드래곤라자』를 계기로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였다. 최강민은 2003년에 발표한 「대중적 판타지소설과 서구중심주의」라는 글에서 최근 들어 독자들은 동양의 무협소설보다 서구의 판타지소설에서 남성적 동일시 욕망을 대리 충족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무협소설에 독자가 식상한 점도 있지만 환상소설이 좀 더 세련되게 남성적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 그렇다면 판타지소설은 무협소설과 어떤 점에서 차별성을 확보했기에 짧은 시간에 많은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무협소설과 달리 일부일처제를 신봉하는 판타지소설의 주인공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수용하여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한다. 또한 판타지소설은 무공 내지 마법의 고하로 위계질서가 일률적으로 재편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무협소설보다 권선징악의 구도도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차이점은 표면적일 뿐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한 채 남성들이 꿈꾸는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점은 동일하다.”

무협소설도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구적 판타지소설과 결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리하여 무협과 판타지의 결합, 즉 ‘무협판타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무협판타지의 원조격에 해당되는 작품이 바로 전동조의 『묵향』이다.

최강민은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은 모두 ‘영웅의 탄생’을 꿈꾼다. 이것은 두 개의 문학장르가 일상에서 일그러지고 왜소화된 소시민의 욕망을 매개로 성장한 문학이기 때문이다. 영웅이 사라진 현대에 끊임없이 영웅을 호출하는 무협소설과 판타지소설은 일종의 파시즘적 정서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러한 환상소설들은 소수의 영웅 대 다수의 비영웅이라는 이항 대립 체계를 생산하며 권력 욕망을 재현한다”고 말했다.

판타지소설 또는 환상소설에 대한 문학평론가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예컨대, 김성곤은 작금의 대중적 환상소설을 ‘저질 문화 쓰레기’라고 비난했으며, 하응백은 ‘문학이라기보다는 활자로 된 신종 문화 산업’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의 문학적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최강민은 다른 자세를 취했다. 환상소설을 진지한 탐구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다. 그는 “일반 대중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중적 판타지소설에 대한 평론계의 작업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기존 평론계가 ‘본격문학/대중문학’이라는 이원적 구도에 여전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중문학에 관심 있는 전문 비평가의 부재가 초래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판타지소설에 대한 비평적 무관심이 서구중심주의를 확산시키는 데에 일조를 했다는 점에서 평론계의 직무유기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강민은 “우리는 종종 비현실적 환상의 서사에서 당대의 진실을 발견한다. 한국에서 환상소설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더 이상 기존의 현실이라는 프리즘만으로 당대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반성적 자각의 소산이다. 상상력의 벽에 부딪친 일부 작가들은 환상을 새로운 상상력의 돌파 수단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문학의 지형을 탐색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디지털 문화를 배경으로 한 가상현실의 롤플레잉게임(RPG)도 환상소설을 유행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강민은 “환상이 구축한 초월적 세계는 무(無)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현실을 비틀고 찢는 콜라쥬와 몽타주 등에 의해 변용된 세계”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곳은 현실의 규율이 적용되지 않기에 억압된 욕망이 마음껏 탈주하는 해방의 시공간이다. 이런 점에서 ‘환상문학은 문화적 억압이 야기하는 결핍을 보상하려는 욕망의 문학’이다. 환상이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놓는다는 것은 기존 지배질서와 충돌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환상문학이 현실의 제반 모순을 망각하는 최음제라는 일부의 시각은 그 타당성을 상실한다. 물론 일부의 환상문학이 현실도피와 정체성 혼란을 부추긴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환상문학을 싸잡아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서 지적됐듯이, 최강민은 환상소설을 ‘서구중심주의’라고 하는 관점에서 비판했다. 그는 소설에서 형상화된 세계가 이국풍으로 도배질돼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작금의 대중적 환상소설은 ‘외국것 콤플렉스’가 극단적으로 발현한 매판적 종속문학”으로 규정했다. 그는 영어식 담론과 서구추수주의를 문제 삼으며 그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대중적 판타지소설의 독자층은 대개 70, 80년대에 태어나 근대화의 모순보다 혜택을 누리며 성장한 10, 20대가 중심을 이룬다. 거대 이념의 중압에서도 자유로운 그들은 인터넷이나 전자게임을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영어와 접한 신세대이다. 그들에게 영어는 낯선 외국어라기보다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언어이자 타인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필수품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어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주체적 목소리는 시대착오의 보수성이나 세계화를 가로막는 방해꾼으로 치부되기 쉽다. 판타지소설에 나타난 영어식 담론은 그들에게 오히려 영어를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는 훌륭한 교과서로 인식된다.”

최강민은 “서구가 동양을 바라보는 방식이 오리엔탈리즘이라면, 동양이 서구를 바라보는 방식은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다. 샤오메이 천에 따르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지배하기 위한 제국주의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동양의 옥시덴탈리즘은 서구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로 사용된다. 옥시덴탈리즘이 바라본 서구는 착취와 수탈을 하는 제국주의 국가 내지 선진문명을 자랑하는 민주국가라는 양면성 위에 자리한다. 동양은 이러한 상반된 이미지를 각자가 처한 정치적 입장에서 이용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대중적 판타지소설은 대개 서구를 선진문명의 이상향으로 상정한 채 서사를 전개하는 옥시덴탈리즘을 보여 준다. 문제는 그것이 주체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편이거나 정치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저항담론의 형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판타지소설이 보여 준 옥시덴탈리즘은 거대 제국과의 동일시 속에 스스로 자신을 하위 주체로 규정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출발한다. 이런 점에서 판타지소설이 보여 준 자기비하의 옥시덴탈리즘은 서구가 동양을 지배하려는 방식인 오리엔탈리즘과 일종의 공모 관계에 놓여 있다.”

판타지소설을 읽는 주된 이유가 ‘힐링’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문제는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김영민은 “환상(illusion)은 공상(fancy)과 달리 비교적 체계적이다. 공상은 어떤 순발력의 이름이지만, 환상은 순발력이 사라져 버린 상상의 형식을 가리킨다. ······ 공상에는 환멸이 없지만, 환상에는 환멸이라는 비용이 따른다”고 말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판타지소설 (세계문화사전, 2005. 8. 20.,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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