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우화

디지털 시대의 우화

바자 2019-04-16 16:00:00 신고

여보세요? 저 조금 있다 잠깐 들를게요.”

부모님 댁은 내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아파트 현관문의 디지털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니 “배터리를 교체해주십시오”라는 경고 메시지가 울려 퍼진다. “아휴, 미리미리 건전지 좀 바꿔 끼우시지, 이러다 어느 날 문이 안 열리면 어쩌시려구 그런대요?” 신발을 벗기도 전에 입에서 곱지 않은 말이 튀어나온다.

문득 신경이 쓰인다. 내 부모는 맥도날드의 무인 주문기를 이용할 줄 알까? 디지털 소외라는 것, 뉴스로 보고 막연히 안타깝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내 부모가 그 주인공은 아닐까? “저 가요.” 거실의 홈 오토메이션 모니터를 터치해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그동안 트위터를 들여다본다. 엘리베이터는 1분도 채 안 되어 올라올 테지만 그 잠시의 여백이 그렇게 지루하다. 때론 뉴스보다 트위터가 더 빠르다. 매일 오가는 길이 오늘따라 왜 이따위로 꽉 막힌 건지, 이번 주 드라마가 결방인지 아닌지 클릭 몇 번에 즉시 답이 나온다. 스마트폰은 역시 최고다. 전쟁이라도 나봐, SNS에 실시간으로 사진이랑 영상이 잔뜩 올라올걸, 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난해 말 KT 아현지사에서 일어난 화재가 떠오른다. 인터넷이 안 된다니 답답하겠다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였다. 만약 우리 동네에도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어쩌지, 혼자 사는데 연락도 안 되면, 트위터도 당연히 안 될 거고, 와, 너무 무서운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 머릿속에서 무서운 상상을 몰아낸다. 설마 그런 일이야 있겠어. 다른 생각을 하자. 요즘 홈쇼핑에서 트롬 스타일러를 팔던데, 고것 참 탐난단 말이지. 미세먼지에도 좋다던데. 만약 사면 어디에 놓지? 맞다, 건조기도 사고 싶어. 남들에겐 버킷 리스트가 있다는데, 나에겐 ‘사킷 리스트’가 있다. 사고 싶은 게 떠오를 때마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쭉 적은 다음 하나씩 사 모은다. 벼르던 발뮤다 주전자를 영접하니 커피 맛이 훨씬 좋아졌다.(기분 탓일 겁니다.) 로봇청소기는 꽤 오래 고민했는데 결국 그 절반 가격인 에브리봇 물걸레 청소기로 셀프 타협했다. 고놈 참, 땅콩처럼 생겨 갖곤 왱왱거리며 집 안을 열심히 돌아다닌다. 얼마 전엔 애인에게 생일 선물로 다이슨 헤어드라이어를 받았다. 물론 콕 집어 이거, 라고 지정했다. 비싼 만큼 뭐가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분만큼은 확실히 좋다. 하루 한 번, 매일 꼭꼭 쓰는 물건이니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걸로 값어치는 다했다고 본다.

또 뭘 샀더라? 혼자 사는 집에 가전이 많기도 많다. 거실엔 엘지 공기청정기와 샤오미 가습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가습기는 중국에서 직구한 거라 110V 콘센트에 220V 변환기를 꽂아야 한다. 식탁 위엔 갤럭시 노트와 엘지 그램 노트북, 아이패드, 애플펜슬, 전자책 리더기인 크레마 그랑데가 놓여 있다. 전자기기가 여럿이니 충전기도 여럿인데, 언제 뭘 충전해야 할지 모르니 아예 USB 단자가 잔뜩 달린 충전 허브를 샀다. 몽땅 꽂아놓으니 안심. 아 참, 보조배터리를 깜빡했네. 이따가 외출할 거니 미리 충전해두자.

배터리 충전을 잊으면 곤란하다. 각 기기의 배터리 아이콘을 흘끔거리며 충전량을 확인한다. 70%만 되어도 마음이 불안하다. 한참 쓰는 도중에 꺼져버린다면 낭패다. 이러다 금방 50% 되고 30% 될 거 아냐. 이런 것도 심하면 강박증일 텐데 싶지만, 언제 충전했는지 가물가물한 우머나이저를 신나게 사용하다 갑자기 뚝 하고 진동이 멈춘 경험 이후론 엄청 신경 쓰고 있다. 말도 마세요, 살면서 그렇게 김이 팍 샜던 적은 또 없어요. 애매한 포즈로 오열할 뻔했다니까요. 어머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얼른 충전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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