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에술 작가를 돕는 홍콩 컬렉터

홍콩의 에술 작가를 돕는 홍콩 컬렉터

노블레스 2019-05-20 00:00:00 신고

건축가이자 아트 컬렉터 윌리엄 림.

그를 만난 곳은 건축 사무소가 있는 센트럴(Central)이 아닌, 외딴 공장 지대인 웡척항(Wong Chuk Hang)이었다. 그는 대형 화물차가 분주히 다니는 공장 지대 안에 비밀 스튜디오가 있다고 했다. 복잡한 일을 뒤로하고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 방금 다녀온 전시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젊은 작가에 대해 좀 더 알아내고 싶을 때 들르는, 봄볕 드는 둥지 같은 곳이다. 아트 바젤 홍콩 기간엔 지인을 초대해 이곳에서 프라이빗 쇼를 열기도 한다.
덜컹, 육중한 소리를 내며 멈춘 화물칸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보이는 현관엔 홍콩에서 활동하는 듀오 아티스트 그룹 맵 오피스(MAP Office)의 네온 작품 ‘Hong Kong is Our Museum’이 반짝이고 있었다. 현대미술품을 모으기 전 그가 골동품 수집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앤티크 테이블과 조명, 의자 등이 놓여 있고, 천장엔 샘슨 영(Samson Young)의 네온 작품 ‘Why Have You Forsaken Me’가 걸려 있다. 지극히 사적인 취향 아래 질서 정연하게 배열돼 있지만, 처음 이곳에 들어선 필자에겐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놓인 모양새가 카오스처럼 느껴졌다. 바닥, 천장, 화장실까지 빼곡히 찬 수백 점의 작품을 건드리진 않을까 발걸음까지 조심스러웠다.




1 섹스, 정치 등 민감한 주제를 애니메이션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이용해 영상 작품으로 만드는 웡핑(Wong Ping)의 ‘Jungle of Desire’의 스틸 컷.
2 일상의 풍경을 드로잉과 페인팅으로 작업하는 청팅팅 (Cheng Ting Ting)의 ‘Plant Pots on the Third Floor’.
3 모래, 합판 등을 섞어 설치 작품처럼 보이는 드로잉 작업을 하는 람퉁팡(Lam Tung Pang)의 ‘The Huge Mountain’.

은밀하고 수상한 이 스튜디오에 대해 소개 좀 해주세요.
저와 아내가 함께 수집한 모든 작품(그리고 물건)과 제가 만든 가구가 어우러져 있는 은신처 같은 곳이죠. 수집에 대한 욕구, 열정, 환희, 고민 등이 응집되어 있어요. 상대적으로 집엔 미술품이 없는 편이고요.(웃음) 이 장소를 마련한 후 비슷한 시기에 다수의 갤러리가 이 주변에 문을 열었어요. 지금은 웡척항을 중심으로 미술 행사가 열릴 만큼 이곳이 신진 작가를 찾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핫 스폿이 되었죠.

당신의 컬렉션은 마치 홍콩 작가의 성장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자국 아티스트의 작품을 주로(약 80%) 컬렉팅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향수를 달래기 위해 중국 앤티크를 수집했어요. 그땐 예산도 부족했고 작품을 보는 눈도 없던 때라 작품보다는 가구를 많이 샀죠. 그러다가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를 접하며 현대미술 작품에 관심을 가졌고, 더 좋은 작품을 찾기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 관심을 둔 작가는 딩이(Ding Yi)와 쉐둥(Xue Dong) 등 중국 본토 작가였죠. 중국 작가 붐이 한창 일 때였거든요. 하지만 중국 작가는 승승장구한 반면 홍콩 작가는 계속 침체되어 있었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홍콩 작가에게 관심을 가진 건 2003년부터입니다. 홍콩 도심의 한 갤러리 골목에 작은 리빙 숍을 연 저는 우연히 주변 갤러리를 방문했다가 저의 첫 홍콩 아티스트 컬렉션이라 할 수 있는 윌슨 시에(Wilson Shieh)의 페인팅 ‘Skating’을 만났어요. 실크 위에 섬세하게 그리는 중국 전통 화법인 공필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이었습니다. 이후 비영리 예술 공간 ‘파라 사이트 아트 스페이스’의 큐레이터 토비아스 베르거(Tobias Berger)를 만나 친해졌고, 그를 통해 흥미로운 작품을 접하며 점차 젊은 작가들의 묘한 열정에 빠지게 되었죠.

2014년 홍콩 미술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 그리고 개인 컬렉션을 정리한 책 < The No Colors >를 보면, 이전에 홍콩 작가들의 상황은 아주 열악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론 어땠나요? 또 컬렉팅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 계기도 궁금합니다.
홍콩에 세계적인 갤러리가 들어서고 국제 아트 마켓이 형성된 건 불과 몇 년 사이 벌어진 일이에요. 홍콩 아트 마켓은 여전히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홍콩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을 수집한 2003년엔 고가의 작품을 거래하는 미술 시장이 전무했어요. 예비 아티스트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완차이 지역의 푸탁 빌딩(Foo Tak Building: 20개의 방을 잠재력 있는 작가에게 빌려주는 홍콩의 예술 명소) 같은 곳을 찾아 공간을 나눠 쓰며 작업하는 식이었죠. 작업실이 작아 대형 작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요. 아이디어가 기발한 작가들은 접는 캔버스를 개발하기까지 했죠. 열악한 환경은 작가의 상상력과 활동 범위를 제한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작가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치열하게 작품을 생산했죠. 정리하면, 미술가가 철저히 소외되는 홍콩에서 부모에게 ‘미래가 없다’는 의미의 “No Colors”라는 비판을 들어가면서도 예술을 하는 그들의 ‘용기’와 ‘절실함’, 그것이 제 아트 컬렉팅의 첫 단추였어요.




4 홍콩 웡척항 공장 지대에 있는 윌리엄 림의 스튜디오 전경.
5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처럼 마음을 파고들어 강력한 울림을 주는 젊은 작가 피렌제 라이(Firenze Lai)의 ‘Look at You’.
6 한국 작가 이불의 ‘United Sculpture W2-2’. 윌리엄 림이 7년 전에 구입한 것으로, 그는 양혜규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컬렉션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컬렉팅은 어떤 개념과 문화의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를 열어젖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책을 내고 제 컬렉션을 정리하며 미처 몰랐던 홍콩 미술계, 그리고 작가들에 대해 이해하게 됐죠. 과거엔 테마와 목표를 정하고 컬렉팅했다면, 지금은 과거에 수집한 작품에서 연결 고리를 찾아 여러 소주제로 나누고 그것을 넓히는 식으로 변화했어요. 요즘엔 정보가 너무 많아 좋은 작가를 만나기가 되레 어려워요. 또 자국보다 타국에서 만난 홍콩 작가에게 놀라움을 느낄 때가 많죠. 그래서 최근엔 홍콩 밖에서 홍콩 작가를 찾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홍콩이 아닌 타국에서 성장한 작가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홍콩 출신의 다양한 신진 작가를 후원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들을 직접 만나 작품을 구입하는 식으로 후원하나요? 직접 만나진 않습니다. 미술관과 갤러리를 통해 작가를 발견하고 그런 기관을 통해 작품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후원하죠. 한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관찰하고 구입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좋은 컬렉터는 ‘수집’이 아니라 ‘관찰’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작가의 성장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그들의 활발한 활동과 변화를 살피죠. 한 작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기까지, 한 인간의 인생사를 기록하듯 작품을 수집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세계적 작가가 된 창킨와(Tsang Kin Wah)나 샘슨 영 등이 그랬고, 지금 이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작품이 그렇습니다.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저쪽 천장에 매달린 한국 작가 이불, 나란히 놓인 양혜규의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7~8년 전, 그들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을 때, 그들의 ‘과거’를 살피고 공부해 구입한 것이죠. 물론 지금 그들의 현재도 지켜보고 있고요.

< The No Colors >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작가가 ‘오늘’의 작가가 된 것처럼, 신진 작가를 선별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아요. 다 연구를 통한 결과인가요?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을 신뢰한 덕분이죠.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보여주는 지금 시장에서 활약하는 스타보다 고요하지만 스스로 에너지를 응집하고 있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작가를 찾는 편이에요. 가능하면 중심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미술대학 졸업 전시에 가기도 하고, 신진 작가만 소개하는 갤러리를 찾기도 합니다. 저는 건축가로서 전체를 관통하는 컨셉을 파악하는 데 익숙해서인지 작품을 보면 그 자체가 여물지 않아도 작가가 추구하는 바를 빠르게 읽어냅니다. 컨셉이 정확하고 남들과 다르면 제 피부가 먼저 반응하죠.

이스트 홍콩 호텔, 아이콘 호텔,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등 당신의 손길을 거친 건축물엔 예술 작품이 놓여 있고, 예술가의 설치 작품 같은 예술적 기운도 감돕니다. 특히 H 퀸스는 실제로도 그렇지만 예술 작품 전시와 참 잘 어울리는 빌딩이죠. 사실 H 퀸스는 평범한 오피스 건물을 짓고자 하는 클라이언트에게 시장 상황에 대한 결과물을 제시하며 설득시킨 경우예요. 컬렉터로서 갤러리를 운영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인 대형 작품의 이동과 설치를 위해 건물 자체의 디자인을 바꿨죠. 홍콩은 다른 지역과 달리 갤러리 규모가 작은 편이라 공간 배치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어요. 호텔의 경우 클라이언트가 먼저 예술 작품을 원하는 경우도 많죠. CL3 건축 사무소 내에도 큐레이터가 있어 필요에 따라 컨셉에 맞는 작품을 역으로 제안하기도 하고요. 이스트 호텔 홍콩에 설치한 굼츠커웅(Kum Chi Keung)의 설치 작품 ‘Bamboo City’는 커미션으로 완성했어요.




7 윌리엄 림이 제작한 ‘54:10, Artist’s Table’. 스튜디오 곳곳엔 그가 직접 만든 예술적인 가구가 놓여 있다.
8 스튜디오 중앙에 놓인 대형 책장에는 그가 탐구한 작가에 관한 자료와 1980년대부터 모은 중국 앤티크 작품, 아트 상품을 볼 수 있다.

홍콩에도 미술 공간이 많이 생겼습니다. 지난해 H 퀸스 빌딩과 교도소를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타이쿤(Tai Kwun)이 오픈했고, 올해 M+ 뮤지엄이 공식 오픈하고, K11 아틀리에가 세워지는 빅토리아 도크사이드(Victoria Dockside) 지역을 아트 디스릭트로 바꾸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이런 반가운 변화 속에 어떤 이들은 상업적 미술 공간이 생기는 것을 우려하기도 합니다. 흔히 홍콩을 자본주의만 존재하는 마켓으로 보는데, 몇 년간의 결과로 보면 상업주의가 끌어낸 긍정적인 면도 많습니다. 아트 마켓이 돈과 권력으로 움직이는 것은 현실이고, 그런 시장 형성이 곧 콘텐츠가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거죠. 지금 홍콩은 돈을 보고 몰려드는 컬렉터와 무조건 해외로 나가 성공을 꿈꾸는 홍콩 작가들이 성장통을 겪으며 더 성숙하고 합리적으로 변모하는 중이에요. 평범한 홍콩 사람들도 작가가 하는 일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고, 작품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찾죠. 몇 년 사이 홍콩 미술계가 눈부시게 발전한 건 경험 많은 미술 전문가들이 홍콩으로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미술 공간의 숫자보다 사람들의 관계와 힘의 균형이 더 견고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 몇 년간 홍콩 미술계가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젠 숨을 고르고 제 호흡을 찾고 있는 셈이죠.

컬렉터로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프라이빗 컬렉션 전시를 열어보고 싶어요. 2016년 서울오픈아트페어에 초대받아 건축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고 소더비 홍콩과도 소장품 전시를 연 적이 있어요. 제 컬렉션을 소개하는 책을 출판했듯, 전시를 통해 컬렉션에 담긴 제 경험과 취향을 공유하고 싶어요. 또 지속적으로 작가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현명한 갤러리를 통해 좋은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는 걸 말하죠. 소용돌이처럼 움직이는 홍콩 미술계에서 객관적이고 명확한 시각을 갖는 건 매우 중요해요. 조용하고 은밀하게, 가장 정직한 방법으로 작가를 후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어떤 아트 페어에 갈 예정인가요? 올해도 많은 아트 페어가 열리겠지만 저는 여러 곳에 다니기보단 제 컬렉션을 탄탄히 하는 데 더 신경 쓰고 싶습니다.




9 영국의 팝 아티스트 줄리언 오피(Julian Opie)의 ‘Antonia with Yellow Shawl’.
10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홍콩 대표로 참여했고,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며 더욱 유명해진 창킨와(Tsang Kin Wah)의 ‘Pretty $hit- Pi$$ Pretty’.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계안나(프리랜서)   사진 Jackie L(인물,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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