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리단 길의 어느 ‘다방’에 갔다. 시골 읍내에 있을 법한 간판을 달고 있지만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복고풍 컵에 담긴 흑설탕 음료가 꽃무늬 양은쟁반 위에 올라가 있고 벽을 장식한 달력과 시계 역시 고색창연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것이 모던한 세상에 태어난 Z세대들은 옛것이 새롭고 재미있단다. 어떤 학생은 전설의 시트콤 <순풍산부인과>를 보고, 거리에는 20~30년 전 노래가 리메이크돼 흘러나온다. 외출할 때마다 흡사 타임머신을 탄 듯한 착각에 어리둥절해진다. 핫한 동네 얘기만이 아니다. 즐겨 먹던 라면이나 과자까지 추억의 포장으로 출시돼서 인기를 얻고 있다.
여기 매력적인 소설이 있다. 나는 어릴 때 동화책으로 처음 접했다. 곧 영화와 공연으로 각색되고 노래가 되다가 마침내 한물간 전설이 되는 듯싶더니, 다시 돌아와 최고의 히트작이 됐다. <레미제라블>이다. 이러한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과거의 기억과 숨바꼭질하는 이 예술적 놀이는 사회 구석구석에 퍼져 내 집 앞 골목까지 차근차근 접수 중이다.
이 문화의 원천을 향유한 앞선 세대에게 ‘뉴트로’는 익숙한 듯 신기하다. 때로는 이상하게 오글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디테일이 다르고 소비의 방법도 다르다. 문화예술은 더 이상 ‘예술작품’에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에게 문화란 일상이다. ‘나’의 일상이므로 남들의 판단이나 평가는 중요치 않다. ‘구식·신식’ 내지는 ‘주류·비주류’ 등의 경계선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것.
음반 인기차트, 시청률이 높다는 TV 프로그램, 화제의 영화와 공연, 책들…. 가정이나 직장에서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이런 것을 틈틈이 소비하는 것이 필수인 세상이 됐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바쁘다. 잠깐 눈 돌리는 순간 한물간 꼰대가 될 것 같아 무섭다.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면 모든 게 쉬워진다. 반복 속의 다름을 찾아내는 일.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와 거미의 ‘님의 먼 곳에’ 사이의 거리랄까. 디테일에 집착하면 차이가 아니라 공감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꿍따리샤바라”를 외쳤던 나의 뜨거웠던 청춘은 이 더운 여름에도 한기가 들까 무서워 찬물을 피할 만큼 조금 식었다. 청춘기억 마케팅에 이용당할 만큼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며 어린 조카와 함께 눈물콧물 흘린 지난 주말이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면 어떻고 죽은 소설의 사회면 어때. 톨스토이면 어떻고 웹소설이면 어때. 밤새워 읽어서 나만 즐거우면 그만이다. 오래된 것이건 새로운 것이건 그런 집착은 없어진지 오래다. 문화를 욕망하고 수용하고 몰입하고 싶다. 추억에 잠기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 시절을 즐기고 싶다.
망리단길에서 본 어느 가게의 이름이 ‘호시절’이다. 지금이 호시절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확실한 것은 호시절의 LP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정재희는 누구?
정재희는 문화예술기획자다. 현재 한국 늘상예술 망원동창작가들 소속으로, 일본 컬처컨비니언스클럽 문화 MD로도 활동하고 있다. 앞서 2018평창동계올림픽 홍보영상을 진행하고 스타응원단을 운영했으며, 팀라루나 대표로서 ‘DDP 서울컬렉션’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등의 쇼 기획과 운영을 맡기도 했다. 이 밖에도 신차 발표회와 음반 쇼케이스, 패션쇼, 북콘서트 기획·운영·음악감독 등 다방면에서 재주를 뽐내 왔다.
<정재희(문화예술기획자)>정재희(문화예술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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