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panic)’의 어원이 된 숲의 신 '판', 한 장으로 배우는 미술사 ⑤

그라피 2019.08.14 11:40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판과 쉬링크스, 1625년경

그리스 신화와 예술 - 판

지난 호에서 헤르메스가 아르고스를 슈링크스(팬플루트) 연주로 잠재우고 퇴치 했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리 악기를 불어도 아르고스가 잠들지 않자 헤르메스는 이 악기에 얽힌 일화를 말해줍니다.

"옛날에 슈링크스라는 요정이 있었는데, 숲속에 사는 다른 요정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슈링크스는 누구의 사랑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직 아르테미스 여신만을 숭배하며 함께 사냥만 하고 있었대요. 사냥옷을 몸에 걸친 슈링크스의 모습은 아르테미스 여신과 맞먹을 정도로 아름다웠지요. 다른 점이 있다면 슈링크스의 활은 뿔로 되어 있었는데 아르테미스의 활은 은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 정도겠죠.

어느 날 슈링크스가 사냥에서 돌아오다가 판을 만났대요. 판은 그녀를 온갖 말로 유혹하기 시작했죠. 슈링크스는 그의 찬사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도망갔어요. 판은 슈링크스의 뒤를 쫓아 결국 강둑 부근에서 붙잡았죠. 슈링크스는 다급하여 친구인 물의 요정들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요정들은 그녀가 외치는 소리를 듣자 곧바로 도와줬어요.

판이 슈링크스를 끌어안는 순간, 그녀의 몸은 한 묶음의 갈대로 변해버렸어요. 판은 탄식했지요. 그런데 그 소리가 갈대 줄기 안에서 구슬프게 울렸어요. 판은 그 소리가 너무 신기하고 아름다 워서 말했대요. “이렇게 된 바에야 어떻게든 너를 내 것으로 만들어 사랑할 거야.” 그리고는 갈대 몇 줄기를 쥐고 길이가 서로 다르게 하여 나란히 합쳐 피리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피리를 슈링크스라고 불렀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도중 아르고스는 잠들었고 헤르메스는 그를 퇴치할 수 있었죠. 슈링크스 일화는 헤르메스가 아르고스를 퇴치하는 이야기 속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액자 구조인 셈입니다. 액자 속 이야기에서 슈링크스는 갈대로 변신한 후 판이 가장 사랑하는 악기가 되어 늘 그와 함께 다니게 됩니다. 또한 액자 밖 이야기에서 아르고스는 비록 죽지만 그의 눈들은 헤라가 가장 아끼는 공작새의 꼬리에 붙어 헤라 옆을 지키게 되죠. 이처럼 액자 속과 밖의 이야기는 서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이 두 이야기를 연결하는 게 바로 슈링크스입니다.

루벤스, 미다스의 판정, 1640년경
 

슈링크스는 오늘날 팬플루트(팬플룻)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팬플루트는 ‘판의 플루 트’라는 뜻이죠. 갈대 줄기만 있으면 아무 때나 만들 수 있는 악기로 기원이 오래 됐고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모양의 악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로 들판에서 일하는 목동이나 유목민이 불었으리라 짐작되는데, 판이 양치기의 신이자 전원의 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리 있는 추측일 것입니다.

판은 삼림과 들을 관장하고 또 양떼나 양치기의 신이며, 작은 동굴에 살면서 산과 계곡을 돌아다니고, 사냥을 하거나 요정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는 슈링크스를 만들었고 연주도 잘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판은 무모하게도 자신의 피리 솜씨를 아폴론의 리라 솜씨와 겨루어 보겠다고 도전했다. 아폴론은 이 도전에 응했고 산의 신 토몰로스가 심판자로 선정됐다. 신호가 떨어지자 먼저 판이 피리를 불었다. 그 소박한 가락은 자신은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해 있던 판의 충실한 신자 미다스를 크게 만족시켰다.

토몰로스는 판의 연주가 끝나자 태양신 아폴론에게 고개를 돌렸고, 모든 수목들도 일제히 고개를 아폴론을 향해 돌렸다. 아폴론은 일어섰다. 머리에는 파르나소스 산의 월계수 관을 쓰고, 티로스 지방의 자주빛 염료로 물들인 옷을 땅에 끌리도록 입고, 왼손에 리라를 들고 오른손으로 줄을 탔다. 아름다운 리라 소리에 반해버린 토몰로스는 즉석에서 아폴론의 승리를 선언했다.

모두가 이 판정에 만족했지만 판의 신자였던 미다스는 승복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폴론은 격조 있는 음악을 못 알아듣는 무식한 귀를 더 이상 인간의 귀 모양으로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미다스의 귀를 길게 잡아 늘여 안팎으로 털이 돋아나게 하고는 귀를 움직일 수 있게 하여 당나귀의 귀와 똑같이 만들어버렸다. 미다스는 소아시아 지역 프리기아의 왕으로,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모두 황금으로 변하는 ‘마이더스의 손(Midas touch)’이란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지요.

아폴론의 벌로 당나귀 귀를 갖게 된 미다스 왕은 이를 감추려고 넓은 두건을 쓰고 다녔는데 이 비밀을 아는 단 한사람은 왕의 이발사였습니다. 비밀을 누설할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던 이발사는 들판에 구덩이를 파 고 비밀을 말했는데, 그 자리에서 자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속삭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삼국유사>에도 이와 유사한 신라 경문왕의 당나귀 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프란치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 마녀의 안식일, 1797년경.
프란치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 마녀의 안식일, 1797년경

미다스 외에도 아폴론은 자신의 음악적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에게 가차 없이 형벌을 내렸습니다. 판은 헤르메스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며, 디오니소스는 한때 판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답니다. 판은 사티로스라고도 불리는 반인반수로, 상체는 사람에 양의 다리를 가진 모습에 머리에는 양이나 염소의 뿔이 달려 있기도 합니다.

판은 종종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지요. 실제로 사티로스의 영어 표기인 ‘satyr’는 색광이란 뜻이며, 서양 문화권에서는 양이나 염소를 색을 밝히는 동물로 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은 숲의 신이었다고 했죠. 기독교 문화에서 숲으로 대표되는 자연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의 영역이었고 악마가 깃든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옛날 어쩔 수 없이 숲을 통과해야만 할 사람들에게 언제 판이 튀어나 올지 모르는 숲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패닉(panic)’이라는 단어는 갑작스럽게 느끼는 공포와 관련된 감정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이 바로 판입니다.

한편 ‘pan-’이라는 접두사에는 ‘모든(범(汎))’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다신교를 의미 하는 ‘pantheism’이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이는 판이 우주의 상징이며 자연의 권능이 화한 존재로 여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다신교는 유일신 사상의 기독교 문화에 의해 배척되지만, 판은 유일신의 세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범위를 총괄하는 보편적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혜만 대표 (주)빗경 대표, 비아이티살롱 대표, 한성대학교 한디원 미용학과 겸임교수, 지혜림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석사), 한양대학교 음악사(박사과정), 다수의 음악사 강의 및 칼럼 연재

에디터 최은혜(beautygraph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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