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 편지]육촌-신정민

데일리포엠 2019.09.09 23:47

참나무와 나는 먼 친척간이다

구름이 해를 가리기만 해도 날갯짓을 멈추는 아르고스 나비와 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타원형 자취를 남기는 경단 고둥의 관계쯤 된다

고둥이 언제 그 자리를 지나갔는지 해의 각도를 계산할 수 있다는 생물학자와 아라비아 사막에서 오백 년 혹은 육백 년마다 새로 향나무를 쌓아 올려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향나무와의 관계쯤 된다

자신이 버린 것에서 살아갈 자양분을 얻는 숲, 살기 위해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과의 혈연 숲을 걷는 것이 까닭 없이 좋은 건 그래서다

여섯 사람만 건너 알면 우린 다 아는 사이, 졸참 갈참 졸갈참보다 조금 더 멀 뿐 볕을 향해 가지를 뻗는 피붙이 너와 나는굴참나무와 양버즘나무의 관계쯤 된다


-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파란, 2019)-

*어렵게 도착한 시집입니다.

신정민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가 태풍을 뚫고 무사히 당도했습니다.

첫 시집 『꽃들이 딸꾹』부터 네 번째 시집 『나이지리아의 모자』에 이르기까지 지난 십여 년 동안 그의 시집을 읽은 일은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는데, 어느새 다섯 번째 시집이 당도했네요.

아직 시집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이번 시집의 핵심은 '질문'이란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살면서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참 많은데, 답을 찾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뒷전에 두고 엉뚱한 질문만 던지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우리가 마땅히 던져야 하는 참된 질문들...로 가득한 시집 같다는 생각...

암튼, 눈에 들어온 시 한 편 띄웁니다.

'육촌'

이웃 사촌보다 먼 '육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내가 아무리 멀어도 실은 '육촌' 쯤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양의 '존재론'에 반해 동양은 오랫동안 '관계론'을 이야기해 왔는데, 굳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생명은 서로 연결된 그물망으로 살아간다)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굳이 너와 내가 하나로 이어졌다는 '연기'(緣起)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참나무와 내가 사실은 육촌 쯤 된다는 시인의 말은 이런 질문이겠지요?

더불어 숲을 이룰 것인가? 홀로 고사할 것인가?

"자신이 버린 것에서 살아갈 자양분을 얻는 숲, 살기 위해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과의 혈연 숲을 걷는 것이 까닭 없이 좋은 건 그래서다 "

이 아름다운 문장 하나만으로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입니다.

/박제영 시인(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산문집 『대화』, 『소통의 월요시편지』, 번역서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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