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에서 지워져 미처 알지 못했던 작가들

미술사에서 지워져 미처 알지 못했던 작가들

노블레스 2019-09-19 00:00:00 신고

거장 예술가 주변엔 늘 그들의 영감을 공유한 동료가 있었다. 이들은 미술사에 길이 남을 새로운 사조를 함께 만들어내거나, 거장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최근 런던의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는 거장들의 ‘동료’ 혹은 ‘아내’라는 이름 아래 그동안 조명받지 못한 여성 작가 리 크래스너(Lee Krasner), 도로시아 태닝(Dorothea Tanning), 루치타 우르타도(Luchita Hurtado)의 전시가 열렸다.






리 크래스너의 ‘Combat’ (1965).

미세스 폴록에서 리 크래스너로
“너무 훌륭해서 여성의 작품이라는 걸 모를 정도다.” 리 크래스너의 스승이자 독일 큐비즘 작가 한스 호프만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내린 찬사다. 리 크래스너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 잭슨 폴록의 아내이자 동료다. 자기 파괴적이고 즉흥적인 잭슨 폴록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했기에 그녀의 모습은 천재 예술가의 전형적인 아내로 굳어졌고, 작가로서의 성취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그러기에 9월 1일까지 바비컨 센터에서 열리는 그녀만의 개인전 < Living Color >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리 크래스너의 ‘Assault on the Solar Plexus’(1961).

리 크래스너는 1908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워싱턴 어빙 고등학교,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한스 호프만 미술학교를 거치며 미국 추상주의 화파의 일원으로 경력을 쌓았다. 1941년, 피카소와 마티스 등 당대 최고 작가만 참여하는 <프랑스와 미국 회화>전에 초대된 리 크래스너는 그곳에서 잭슨 폴록을 만났고, 둘은 4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다. 1956년 폴록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지만, 리 크래스너는 작고 직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전시는 그녀의 주요 일대기에 따라 작품 전반을 나눠, 작가만의 액션 페인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상세히 설명한다. 초창기 표현주의는 풀과 꽃 등 작은 것에서 영감을 받은 콜라주 위주로 여성만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후 그녀는 큐비즘을 거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다. 일례로, 폴록이 사망한 후 완성한 ‘Prophecy’는 무의식 속에서 그린 듯한 주술적 연작으로 그녀만의 색깔이 도드라진다. 물론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연상되는 추상화도 있지만 리 크래스너만의 에너지와 색감, 구도는 그보다는 더 섬세하고 친절하다. 이는 둘이 같은 예술을 공유한 게 아니라 영감을 나누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리 크래스너를 밀도 있게 다룬 이번 전시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 Dorothea Tanning >전 전경

여성 아티스트는 없다, 도로시아 태닝
도로시아 태닝은 초현실주의 대표 작가 막스 에른스트의 네 번째 아내다. 1901년 미국 일리노이주 게일스버그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미지의 세계와 초자연적 존재에 관심이 많았다. (시카고 예술 학교를 3주 다닌 걸 제외하면) 태닝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 ‘알지는 못하지만 알 수 있는 상태’를 늘 묘사하고 싶어 했기에 독학을 택했고, 자연스레 초현실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지난 6월, 테이트 모던에서 막을 내린 < Dorothea Tanning >전 또한 그녀의 일대기순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작품은 주로 ‘가정’을 보여준다. 낯선 것과 친숙한 것을 결합해 집을 초현실적 공간으로 만든 후 여기에 그녀가 늘 관심 있어 하던 고딕과 낭만주의 스타일의 시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1946년, 막스 에른스트와 결혼한 뒤로는 욕망과 섹슈얼리티가 돋보이는 작품을 만들었고, 1960년대부터 자신의 재봉틀에 의지해 부드러운 인간 형태의 조각품을 창조했는데, 이는 루이즈 부르주아, 세라 루커스 등 다른 여성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태닝은 한 인터뷰에서 “이 세상에 여성 아티스트라는 건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 아티스트나 코끼리 아티스트와 같이 모순적인 단어죠”라고 말했다. 남편 막스 에른스트를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 같은 남성 위주의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여성이라는 주어진 자격을 뛰어넘어 작가로서 영역을 넓혀간 태닝. 자신만의 사유로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주며 초현실주의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작가 루치타 우르타도

살아감의 힘, 루치타 우르타도
예술가이자 시인, 생태학자, 페미니스트, 패션 디자이너, 사진가이기도 한 1920년대생 여성. 프리다 칼로, 마르크 샤갈, 페르낭 레제, 마크 로스코의 동료이자 볼프강 팔렌과 리 뮬리캔의 아내. 루치타 우르타도를 설명하는 단어를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98세의 루치타 우르타도는 2019년 <타임>이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동시대 작가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이 신비한 작가는 뉴욕 하우저 & 워스에 이어 10월 20일까지 서펜타인 새클러 갤러리에서 개인전 < Luchita Hurtado: I Live I Die I Will be Reborn >을 연다. 내년에는 멕시코 타마요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할 예정이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70년 만에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미스터리에 가까울 정도지만, 이는 우르타도를 유명 작가의 전 부인, 두 아이의 어머니라는 틀에 가뒀기 때문이다.
노력은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 최근 그녀가 꾸준히 쌓아 올린 예술 세계가 드디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우르타도는 아이를 낳는 산모처럼 시선을 아래로 떨구거나 몸을 투과해 똑바로 하늘을 보는 등 여성의 몸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본다. 처음 우주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그녀는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를 보여주고자 초월적 시선을 택했다. 그녀는 “예술은 양치질처럼 필수 불가결한 거예요”라며 예술 활동을 ‘삶의 필요’라고 정의했다. 전남편의 성공에 질투한 적도,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기를 원한 적도 없다고 밝힌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인정받고 주목받는 지금 상황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예술관을 표현할 수 있음이 행복할 뿐이다. 세 번의 결혼과 어린 두 아들을 잃은 경험, 거장들과 나눈 추억을 겹겹이 녹여낸 일상 같은 그녀의 작품은 ‘살아감’의 조용한 힘을 보여준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양혜숙(기호리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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