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시 편지]처마 끝-박남희

데일리포엠 2019.10.10 10:03

사랑의 말은 지상에 있고
이별의 말은 공중에 있다

지상이 뜨겁게 밀어올린 말이 구름이 될 때
구름이 식어져서 비를 내린다

그대여
이별을 생각할 때 처마 끝을 보라
마른 처마 끝으로 물이 고이고
이내 글썽해질 때
물이 아득하게 지나온 공중을 보라

이별의 말은 공중에 있다
공중은 어디도 길이고
어느 곳도 절벽이다
공중은 글썽해질 때 뛰어내린다

무언가 다 말을 하지 못한 공중은
지상에 닿지 않고 처마 끝에 매달린다
그리곤 한 방울씩 아프게
수직의 말을 한다

수직의 말은 글썽이며 처마 끝에 있고
그 아래
지느러미를 단
수평의 말이 멀리 허방을 보고 있다

구릿빛 지느러미는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걷는사람, 2019)

*시월입니다. 시월은 詩月이지요. 시를 읽기 좋은 달이라기보다는 천지간 만나는 만물이 다 시적인 그런 달이지요. 이별마저도 시적인 시절 말입니다. 시월에 도착한 특별한 시집, 박남희 시인의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에서 한 편 띄웁니다.

요즘은 처마 구경하기도 쉽지 않지요. 가을비 내리던 날, 제 또래라면 어쩌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이별을 기다리던 기억 하나쯤 갖고 있을 텐데요.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한갓 뜬구름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처마 밑에서 비를 맞았던가요. 지상이 뜨겁게 밀어올린 얼마나 많은 말이 얼마나 많은 구름이 되고 얼마나 많은 구름이 또 얼마나 많은 비가 되어 내렸던지요.

그 사이 처마도 늙고 뜨겁게 밀어올린 말들도 늙고, 지상도 늙고 공중도 늙고 보니 눈물이 말라버리듯 비가 내려도, 더 이상 어떤 비린내도 풍기지 않는 그런 세월에 닿고 만 것은 아닌지요.

/박제영 시인(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고대문화상 시부문 수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그런 저녁』, 『식구』, 『뜻밖에』, 『푸르른 소멸』,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 산문집 『대화』, 『소통의 월요시편지』, 번역서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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