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은 사이다

윤중강은 사이다

노블레스 2019-10-19 17:00:00 신고

인천에서도 근대건축물이 다수 자리한 인천역 근처. 오래된 일본식 목조 주택을 개조한 카페 2층의 다다미방에서 만난 윤중강 국악 평론가는 전날 부산가야금연주단 공연에서 신선한 해설로 객석을 한바탕 뒤흔들고 올라온 길이었다. “평론에, 연출에, 그리고 공연 사회와 해설까지 바쁘시겠어요” 하니 “공연은 국악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잖아요. 장일범 씨가 공연과 방송 등에서 클래식을 쉽고 재미나게 설명하는 것처럼 저도 국악에서 그렇게 하고 싶어요”라는 답이 돌아온다.
서울대학교 국악과 재학 시절, 객석 예술평론상을 받으며 공식적 국악 평론가 1호로 데뷔한 윤중강은 도쿄 예술대학 민족음악학 대학원 졸업 후 <국악이 내게로 왔다>를 시작으로 <비평에 해답이 있다>, <시대와 축제를 읽다>, <사람과 사람을 잇다> 등 10개의 평론집 시리즈를 발표하며 오랜 시간 국악 현장을 기록해왔다. FM 라디오 <흥겨운 한마당> 진행, 국립중앙극장 자문위원, 국악축전 예술감독, 아리랑페스티벌 예술감독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현장을 기록하는 평론가, 시대를 이해하는 평론가의 삶을 살아온 그가 최근 21세기 전통 예술의 한 돌파구로서 집중하고 있는 건 바로 음악극. <부산아라>, <혹부리장구>, <잔치>, <인천 세 자매 - 홍예문 로맨스>, <바다의 연꽃>, <心不老 - 마음은 늙지 않는다>를 집필하고, 연출하며 다른 장르와 협업하면서 국악의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일에 즐겁게 정진 중이다. 9월 20일 국악계의 거장들이 득음의 경지를 보여줄 <득음> 공연의 사회에 이어 열흘 뒤 본인이 운영하는 만요컴퍼니의 <오빠는 풍각쟁이> 공연을 준비 중인 그는 다다미방에서 거침없는 수다쟁이의 면모를 가감 없이 보여줬다.

어제 부산가야금연주단 공연에서 사회자인 동시에 공연 해설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추구하는 국악의 대중화, 국악의 축제화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평론 활동만큼 해설가로 공연에도 많이 서시는 것 같아요.
국악과 대중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접점이니까요. 저는 공연에서 가급적 국악 아닌 듯 국악 이야기를 하는 편이에요. 예전에 국악을 하신 분들은 사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강의처럼 전달했지만 공연 해설은 그것과 다르거든요. 롤프 옌센이 말한 ‘드림 소사이어티’처럼 이야기가 있는 사회, 이야기가 있는 국악이어야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죠. 앞으로 국악에서도 스토리텔링이 점점 중요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국악계의 이야기꾼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스토리텔링이 국악의 친밀도를 높이고, 국악계 스타를 양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시는 거죠?
네, 국악이라고 하면 안숙선 선생님이나 고 황병기 선생님을 떠올리는데, 국악을 꼭 실기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연주자뿐 아니라 국악 평론가, 기획자, 연출가 그리고 방송인까지 다 중요하죠. 국악과 대중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도 그들이고요.

선생님은 무대에서 어떤 식으로 국악을 전달하는 편인가요?
어릴 적에는 사실 국악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대학에 가서 황병기 선생님의 가야금 연주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아 국악과로 다시 대학 진학을 했죠. 황병기 선생님의 음악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 충격, 재미…. 그런 국악을 관객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이런 국악도 있어. 참 재미있지?’ 하면서 말이죠. 제가 빨간 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도 그래요. ‘국악계에 저런 사람도 있네? 국악에 무슨 매력이 있길래 쟤는 국악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런 호기심을 높이는 중간자 역할이 저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은 호피 무늬 팬츠에 초록색 개량 한복저고리를 입으셨어요. 학창 시절부터 매우 눈에 띄는 학생이었을 것 같아요.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이력도 남다르고요.
저는 약간 피터팬 같은 사람이에요. 조직 내 서열이나 규율을 별로 좋아하지 않죠. 제가 다닌 부평고등학교가 당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이 다니던 학교라 매우 엄격했어요. 겨우겨우 1학년을 다녔는데, 2학년이 되고 보니 제가 좋아하던 미술 선생님은 전근을 가셨고, 설상가상으로 교련 과목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어요. 학교가 너무 재미없어서 아프다고 하고 휴학했어요.

재미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기도 하는군요.
그럼요.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제가 휴학한다고 하니 좋아하더라고요. 제가 좀 미운 학생이었거든요. 말은 안 듣는데 공부는 잘하는 그런 애들 있잖아요. 휴학하고 바로 검정고시에 붙었고 친구들이 3학년일 때 저는 대학생이 됐어요.

그때는 국악 전공이 아니었죠?
처음엔 형을 따라 전산과를 선택하셨다고요. 네, 그때는 서울대도 아니었어요. 아무튼 대학생이 된 후에도 클래식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서 음악다방에 자주 다녔는데, 거기서 황병기 선생님의 음악을 처음 들었어요. ‘와, 어떻게 국악이 이럴 수가 있지?’ 너무 충격적이었죠. 마침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던 친구들이 SKY 대학에 입학하는 걸 보고 샘이 나던 때라 ‘흥! 나도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 갈 거야’ 하고 국악과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에 가야금 전공으로 입학했죠.

가야금 전공이면 대부분 예술고등학교나 국악고등학교 출신이었을 텐데 어떻게 입학하셨어요?
제 학번에는 유독 실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가야금 실기는 낙제 점수만 아니면 통과였어요. 입학한 후 바로 군대에 갔고, 그래서 저는 83학번과 함께 대학을 다녔습니다.

대학에서는 재미있게 공부하셨어요?
복학을 했는데, 83학번 친구들이 가야금을 정말 잘하는 거예요. 서로 경쟁이 치열했죠. 저는 그게 지겨웠고요. 저희 과 교수님을 찾아가 이론 전공으로 바꾸겠다 말씀드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명답을 주셨어요. “야, 너는 이론을 잘하는데 그걸 또 배울 필요가 뭐가 있어. 나중에 가야금 배우려면 레슨비 내고 배워야 하는데 돈 많이 들어. 학교에서 레슨해줄 때 열심히 해.” 그래서 제가 가야금 전공으로 졸업을 했답니다. 수석으로요.(웃음) 물론 그 와중에 딴짓도 많이 했어요. 졸업 후 인문대학 국사학과로 편입하겠다는 생각에 국악과를 다니면서 국사학과 수업을 열심히 들었죠.

남들처럼 선생님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대한 로망이 있으셨군요.
네, 서울대 하면 인문대잖아요. 편입해서 국사학과를 다니면서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예술행정학과도 함께 다녔어요. 석사과정으로요. 그런데 국사학과도, 예술행정학과도 졸업은 못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래요. “너는 들어가기는 참 잘하는데, 나오는 건 왜 이렇게 못하니?”라고. 제가 워낙 이것저것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물론 그 힘으로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는 생각도 하죠.

국악과에 재학 중이던 1985년에 ‘숲에서 전설까지 - 가야금 곡을 통해 본 황병기의 음악과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하면서 국내 제1호 국악 평론가가 되셨습니다. 어제까지 대학생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평론가가 된 거네요.
네, 12월 31일이 제출 기한이었는데, 제 생일이 12월 27일이라 생일날 신나게 놀고 다음 날부터 4일간 화장실만 가면서 황병기에 대한 평론을 써서 제출했어요. 제가 뭔가 하겠다고 생각하면 꼭 하는 집요함이 좀 있는데, 그 덕분에 수상한 것 같아요.

살아 있는 인물을 평론한 선생님의 글은 당시 국악계를 들썩이게 했습니다.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어땠나요?
이혜구, 권오성 선생님이 심사를 하셨는데, 이혜구 선생님이 제 글을 보고는 “이 학생의 시각이 매우 독특하다. 앞으로는 전통 국악뿐 아니라 이처럼 창작 국악도 연구해야 한다”고 하셨다고 해요.

20대 초반에 독특한 시각을 확립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고등학교 때부터 시와 미술을 굉장히 좋아해서 시평과 미술평론을 누구보다 열심히 읽었어요. 서울대에 입학해서도 김윤식, 김현 문학평론가가 쓴 <한국 문학사>(민음사, 1973년)라든가 오광수 미술평론가가 쓴 미술 칼럼을 보면서 문학이나 미술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미술, 문학, 특히 시평에 관심이 많았죠. 그걸 이혜구 선생님이 아셨던 것 아닐까요? “꼭 이 학생에게 상을 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선생님의 평론은 매우 정리가 잘되어 있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쉽게 다가와요. 깊이 있지만 쉬운 글. 사실 이런 글이 가장 쓰기 어렵거든요.
제가 어떤 현상을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하나에 집착해서 깊게 들어가죠. 일본 학자들처럼요.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 평론가들이 국악의 진흥과 발전 같은 거시적 관점에서 썼다면 저는 한두 가지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이걸 해야 한다, 저걸 해야 한다 식으로 말했어요. 많은 국악인이 전통음악을 이야기할 때 저는 창작 음악을 이야기했고, 그들이 창작 음악을 이야기할 때 저는 퓨전 국악을 이야기했어요. 요즘은 너도나도 퓨전 국악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다시 전통 국악을 이야기하고 있죠. 모두 Yes라고 할 때 No라고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광고가 있던데, 그게 바로 저예요.

첫 평론집을 발간하고 2015년에 발표한 <비평에 해답이 있다>까지 총 10권의 평론집을 발표하셨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신문이나 잡지에 무수한 글을 기고하셨죠. 평론가라면 호평과 혹평, 그 경계를 늘 옮겨다니는 글쓰기를 해야 할 텐데, 거기서 중요한 건 뭔가요?
사람들은 평론이란 말을 들으면 ‘까대기’ 같은 비난을 생각하거나, 아니면 굉장히 우호적인 주례사 비평을 생각하곤 하죠. 평론(評論)의 평(評)은 말씀 언(言)에 평평할 평(平)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평론은 ‘말을 통해 자기가 있는 분야를 균형감 있게 만든다’는 거예요.

균형감 있는 평론을 위해 스스로 지키는 법칙 같은 게 있나요?
제가 만든 비평 십계명이 있어요. ‘공연평은 냉정하게, 인물평은 따뜻하게’, ‘한 발은 대상 안에, 한 발은 대상 밖에’, ‘평론은 데스크워크가 아니라 필드워크다’, ‘내가 쓴 비평문을 다른 사람이 인용하게 하라’, ‘비평의 대상이 나의 비평을 공감하도록 하라’, ‘평론가의 변신은 무죄다, 과거의 논리와 감성에서 벗어나라’, ‘평론가는 컨설턴트다, 늘 10년 뒤를 내다보라’, ‘평론 자체가 마이너다. 메이저를 내리고 마이너를 올려라’, ‘같은 장르의 평문을 읽지 마라, 다른 장르의 평문을 읽어라’, ‘평론도 예술이다’.

참으로 촌철살인적 십계명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제가 새겨야 할 몇몇 계명도 있는 것 같아요.
이 10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특히 마지막 항목인 ‘예술적 평론’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끔 평론을 읽다가 ‘어떻게 이렇게 평론이 예술적이지 않을 수 있지?’ 하는 생각에 놀랄 때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평론가라면 과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평론가가 평론에서 예단, 즉 예측과 단정을 하는데 저는 절대 그러지 않아요. 연주를 들을 때도 저는 그 연주만 평해요. 그 연주자의 과거는 다 잊고 그 순간만 보겠다는 거죠. 근데 대부분의 평론가가 연주자를 평할 때, “과거에는 잘했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못했을 뿐이겠지” 이래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저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답해요. “아무튼 오늘은 못했잖아!”




선생님이 현장 중심적 평론을 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과거의 데이터나 미래를 예측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 전력을 다하는 선생님의 인생철학과도 연결되는 것 같고요.
맞아요. 제 삶이 순간을 중요시하는 즉흥적인 면이 있어요. 물론 그 점을 떠나서도 연주는 그 순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 그리고 제 별명 중 하나가 순정남이에요. 순위 정하는 남자! 예를 들면 산조 연주회의 경우, 공연을 마치고 연주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이래요. “이번에 가야금산조에서 네가 제일 잘 탔어, 1번이야. 그리고 너는 두 번 틀렸으니까 4번.”

그러면 연주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죠. 그런데 잘한 사람에게 “너 이번에 진짜 잘했어”라고 말해줘야 하는 것처럼 못한 사람에게는 “너 오늘 연주 별로였어”라고 알려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 나름의 철칙이 하나 있는데, 연주 뒤풀이에는 절대 가지 않아요. 뒤풀이는 사실 “수고했어, 잘했어” 덕담을 나누는 자리인데 거기서 “너 거기 틀린 것 같더라, 오늘 의상은 연주와 어울리지 않았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싫을 거 아니에요.

공연을 본 직후에는 평론가들끼리 감상평을 공유하지 않죠? 그러면 왠지 서로에게 영향을 줄 것 같아요.
친한 평론가가 몇 있는데 모두 같은 특징이 있어요. 공연 끝나고 로비에서 만나면 서로 “말하지 마, 말하지 마” 그래요. 그러다 누가 입을 열 것 같으면 “내가 먼저 이야기할게” 그러죠.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싫은 거예요. 같은 맥락이지만 그래서 저는 우선 국악에 대해 다른 사람이 쓴 평론은 절대 안 읽어요. 상대가 혹시 좋은 표현이나 단어를 썼을 때 무심코 갖다 쓸 수도 있으니까요.

2013년 9월부터 2017년 2월까지 경인일보 ‘윤중강의 음악살롱’이란 칼럼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중 와 닿은 글 중 하나가 국악이 발전하려면 중견과 신인이 경쟁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한마디로 ‘철밥통은 없다’ 이런 이야기인데, 그런 말 들으면 원로와 중견 국악인들이 싫어하지 않나요?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전 미움을 받는지조차 모르는 ‘마이 웨이’로 살아요. 그리고 다들 이제는 “윤중강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하고 받아들이는 면도 있어요.

5년 전 한 인터뷰에서 “나는 경쟁자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빨리 경쟁자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도요. 저도 죽기 전에 그런 말 한번 해보고 싶어요.(웃음)
잘난 척이죠.(웃음) 제 말은 경쟁자를 국악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저는 스스로 미술평론가, 문학평론가들과 경쟁한다고 생각해요. 국악 평론은 이미 너무 많이 썼고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국악 평론가로서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몇 년 전부터는 연출과 대본을 쓰는 데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

2011년에는 국립부산국악원에서 음악극 <부산아라>를 맡아 연출가로 정식 데뷔하셨습니다. 지난 7년 동안 9개 작품의 대본과 연출을 맡으셨더라고요.
오방 사상, 음양 사상, 효 같은 한국인의 철학과 기본 심성을 담아낸 <부산아라>를 시작으로 남산국악당에서 <잔치>,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인천 세 자매: 홍예문 사랑>, 그리고 <혹부리 장구>, <심청의 재구성>, <이동백과 하규일> 공연 등을 연출했어요. 그리고 남성 국극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서 대본을 하나 썼어요. <춘향의 재구성>이 그것인데 변학도와 이몽룡을 동성애 관계로 그렸어요. 변학도는 우직한 흙수저, 이몽룡은 현실적 금수저, 기생의 딸로 태어난 춘향은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것을 취하는 기회주의자 같은 인물이죠. 11월에 공연을 올릴 거예요.

지금은 1930년대 문화에 빠져 계시다 들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일제강점기를 겪었지만 문학이나 음악, 미술에서는 오히려 일제 탄압에 의해 창의적이고 민족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 많이 나왔어요. 홍난파, 정지용 등 당시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때의 지성인이 지금의 지성인보다 생각이 더 깨어 있다는 걸 느끼곤 해요. 그래서 그들의 자료를 조사하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할 때가 있죠.

1930년대에 태어났으면 어떤 일을 하고 계실 것 같은가요?
홍해성 연출가, 홍난파 작곡가, 원우전 무대미술가와 함께 굉장히 좋은 연극을 만들었을 것 같아요.

올해 60세이신데, 국악 평론가로서 맞는 환갑, 윤중강으로서 맞는 환갑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환갑이라는 것이 육십갑자의 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잖아요. 개인적으로는 나의 뿌리, 즉 가족과 고향에 더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평론가로서는 뭔가 하나의 완성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지금까지 제가 해온 평론을 돌아보면서 평론 다이제스트 같은 책을 펴내는 것 말이죠. 물론 제가 지금껏 표방해온 ‘호모루덴스(유희적 인간)’의 면모는 앞으로도 쭉 계속될 거예요.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JK

Copyright ⓒ 노블레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