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은 관객을 향한다

시선은 관객을 향한다

노블레스 2019-11-17 17:00:00 신고

배우 2명과 코러스 2명, 피아노 한 대가 무대를 채운 <마리아 마리아>.

2년 전 <마이티 걸>이란 독회 공연을 봤다. 공연장이 밀집한 대학로에서도 안쪽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간 소극장 무대엔 의자와 대본을 둘 수 있는 보면대만 놓여 있었다. 무대의상이 아닌 연습복과 사복 차림의 배우4명이 차례로 등장해 의자에 앉았다. 분장이나 무대장치도 없고, 배우들의 시선은 상대 배역이 아닌 관객이 있는 정면을 향했다. 그동안 무대장치를 완벽하게 구성한 뮤지컬이나 연극에 익숙했지만, 그날 극소수의 배우가 목소리만으로 전달하는 낭독 공연의 생생함을 경험했다. 그 뒤로 정식 공연을 올리기 전 관객에게 시험적으로 선보이는 리딩 형식의 공연을 종종 찾으면서도 기존의 뮤지컬과 연극 역시 놓칠 수는 없었다. 두 공연의 매력을 살린 공연은 없을까 갈증을 느끼던 차, 독회와 일반 공연의 매력을 동시에 살린 공연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대극장에서 인기를 끈 뮤지컬 몇 편을 중소 극장으로 옮겨 선보인다는 것.
지난여름, HJ컬처가 무대와 등장인물을 간결하게 꾸민 ‘낭독 뮤지컬 시리즈’를 기획했다. 관계자는 시리즈 출범 전 “캐릭터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작품 속 숨은 이야기와 새로운 넘버를 선보인다. 기존 낭독극을 확장해 작품 속 숨어 있는 이야기와 연극적 요소, 뮤지컬에서 느낀 감동을 더하기 위해 앙상블, 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 될 것”이라고 밝히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시리즈의 포문은 <마리아 마리아>가 열었다. <마리아 마리아>는 성경 속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를 마리아의 관점에서 바라본 작품이다. 2004년 제10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작품상, 여우주연상, 작사극본상, 작곡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대형 뮤지컬이 지난 7월 28일 부터 8월 5일까지 배우 2명과 코러스 2명, 피아노 한 대가 무대를 채운 소규모 낭독 뮤지컬로 재탄생, 관객과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또 과거 광림아트센터 장천홀, 아르코아트센터 대극장, 유니버설아트센터 같은 대극장에서 무대를 꾸린 <파리넬리>는 규모를 축소, 지난 8월 11일부터 19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으로 자리를 옮겼고, 8월 25일부터 9월 2일까진 <살리에르>가 기존 뮤지컬의 연극적 요소를 확장하고 음악적 요소를 가미해 뮤지컬의 특성을 놓치지 않은 입체 낭독극으로 재탄생했다.
세 공연이 기존 뮤지컬을 재해석해 소극장으로 끌어왔다면, 아예 처음부터 낭독극 형식을 취한 신작이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했다. 지난 9월 8일부터 16일까지 짧게 펼쳐진 <어린 왕자>다. 생텍쥐페리의 유명 소설 <어린 왕자>를 무대로 옮겨 배우들이 책을 낭독하고 넘버를 불렀다. 공연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 어린 왕자와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이어졌다. 타자기 앞에 앉은 화자 생텍쥐페리와 사막에서 어린 왕자와 만난 생텍쥐페리는 각기 다른 배우가 연기했는데, 넘버 없이 대사나 몸짓으로만 이야기하는 넌버벌 요소는 뮤지컬보다는 연극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기존 뮤지컬을 상상했다면 연극적 대사 톤과 방대한 대사 양에 살짝 지칠 수도 있지만 출연진의 대사 낭독과 표정 연기는 생동감이 넘쳤다. 무대 앞쪽 원형 테이블엔 왕관, 장미, 여우 인형 같은 간략한 소품만 존재해 별다른 무대 세트가 없었는데도 어색함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작은 소품이 주는 힘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고, 실감 나는 연기로 등장인물의 복장이나 무대 배경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낭독 공연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틈틈이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요소를 더해 오히려 본공연보다 표정 연기를 더욱 가까이에서 접할수 있었다.




1 공연을 올리기 전 관객에게 시험적으로 선보이는 리딩 공연은 최근 공연계의 트렌드다. 사진은 지난 2015년 오스틴 필름 페스티벌에 소개된 < The Hand Job >의 리딩 공연.
2 기존 뮤지컬의 연극적 요소를 확장하고 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살리에르>.
3 낭독 공연의 형식을 취해 표정 연기를 더 가까이서 즐길 수 있었던 <어린 왕자>.

이렇게 낭독자가 객석을 향해 책을 읽어주듯 낭독으로 이끌어가는 공연은 완벽한 장치를 갖춘 무대의 강렬함과 화려함은 없지만, 마치 배우와 관객이 마주 보고 대화하는 듯 편안하고 생생한 매력으로 점점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관객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이 낭독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일반 공연은 배우의 몸짓이나 무대장치, 조명, 배경, 오브제 등을 이용해 상황을 전달하지만 낭독 공연은 오로지 배우의 목소리와 표정만으로 관객과의 긴장감을 이어간다. 이번에 선보인 낭독 뮤지컬을 다른 공연으로 다시 다듬을지, 대형 뮤지컬로 각색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도는 언제나 반갑다.
연극의 확장 기법 중 하나인 낭독극은 2인 이상의 참 여자가 리듬, 억양, 박자, 감정을 포함해 대본을 읽는 형식이다. 18세기 귀족이 문학작품을 읽거나, 빅토리아 시대 귀족이 연극 대본을 읽은 데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1940년엔 미국의 레슬리 아이린 코거(Leslie Irene Coger)가 실용적인 문학 스킬로 현대적 낭독극을 연구했고, 용어는 1945년‘Readers Theatre Inc.’라는 드라마 극단이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1951년엔 <인간과 초인(Don Juan in Hell)>의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이 이 형식을 대중적으로 알렸다. 이때부터 기본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입체 낭독극이나 낭독 뮤지컬처럼 다양한 갈래로 확장됐다.
낭독 뮤지컬 시리즈 외에도 올해 국내에선 낭독극의 인기를 반영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지난 6월엔 소극장 산울림에서 영화, 소설, 희곡이 입체 낭독극으로 재탄생, ‘라스낭독극장’이 펼쳐졌다. 영화, 소설, 희곡 등 6편을 낭독극 형식으로 재현하면서 영상, 조명, 라이브 연주 등을 더한 입체 낭독극으로 3주 동안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영화 <만추>와 <더 테이블>, 오카다 도시키의 단편집 <비교적 낙관적인 케이스>에 수록된 ‘쇼핑몰에서 보내지 못한 휴일’과 ‘여배우의 혼’,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희곡 <산책하는 침략자>, 시바유키오의 1인극 <아침이 온다> 등이 입체 낭독극으로 새로이 탄생했다.
그런가 하면 매년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실험하는 제5회 성북 페스티벌이 낭독극을 올해의 테마로 정했다. 9월 8일 단 하루 동안 극단 초인의 <시련>, 달다방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아일랜드의 <위험한 커브>, 성북연극협회의 <사랑의 편지들>을 선보였다. 그중 <사랑의 편지들>에서 연기한 배우 최종원은 “낭독극은 단순하게 읽어주는 것이 아니다. 흰 종이에 작가가 써놓은 검은 글씨를 우리가 소통하는 언어로 바꿔 순수하게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연출과 배우가 결정해놓은 무대가 아니라, 시를 듣고 소설을 읽듯 관객이 느끼는 만큼 다가갈 수 있는 훌륭한 공연 기법”이라며 낭독극의 장점을 어필했다. 이처럼 일반 극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낭독극은 점점 단순 낭독을 넘어서고 있다. 물론 낭독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있지만, 공연 플랫폼을 다양한 갈래로 확장하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배우의 표정 연기, 음악, 무대미술, 조명, 의상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청각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낭독극. 일단 현장을 찾아 감상해보면 어떨까?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백아영(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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