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가 빚진 남자

고흐가 빚진 남자

노블레스 2019-11-17 17:00:00 신고

책장을 넘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끝으로 종이의 결을 찾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담은 ‘갤러리북’ 이야기다. 고흐가 1890년 그린 ‘낮잠’이 실린 페이지를 펼쳤다. 미술관의 비싼 조명이 비추는 듯 그림이 환하게 느껴졌다. 거칠거칠 두툼한 유화물감의 질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한데 반전. 에디터가 만진 건 그냥 흔한 종이였다. 책 만드는 종이보단 아주 조금 두꺼운.
‘갤러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책’이라는 뜻의 ‘갤러리북’은 유화컴퍼니의 대표 유화의 발명품이다. 이 책의 모토는 ‘명화의 색감과 붓터치, 물감 번짐까지 원화를 100% 구현하는 것’. ‘갤러리북’ 시리즈는 100권의 책을 출간하는 게 목표다. 지난 3월,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반 고흐의 대표작 23점을 원작처럼 되살려낸 첫 번째 책을 펴냈다. 그리고 책이 나오자마자 고흐의 고향 네덜란드 미술관 관계자들에게 먼저 보여줬다. 그런 기술을 먼저 개발한 누군가가 있다면 네덜란드부터 찾아갔겠지 싶어서였다. 그는 반 고흐 미술관부터 크뢸러-뮐러 미술관 등을 직접 찾았다. “책을 본 사람마다 깜짝 놀랐어요. 크뢸러-뮐러 미술관 관계자는 대화를 나눈 2시간 동안 책을 아기처럼 품에 꼭 안고 있었죠. 그때 이 기술은 지구에서 나만 갖고 있구나 확신했어요.” 아니, 그런데 잠깐. 그보다 먼저, 그가 어떻게 이런 책을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20여 년 전, 그는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 책 만드는 일에 푹 빠져 있었다. 주말도 없이 회사에서 먹고 자며 수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벽이 나타났다. 인쇄 기술의 벽이었다. “책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인쇄 쪽에 몸담게 됐는데 매번 이상한 얘길 들었어요. ‘이 이상은 안 돼’라는 말이었죠. 저는 이 그림을 이런 색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업계에선 다 안 된다고 했죠. 그런 일을 계속 겪으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마침 그 무렵 어린 시절 고흐 전시회에 갔다가 느낀 충격도 덩달아 떠올랐죠. 오랫동안 교과서에서 본 그림과 고흐의 원작이 완전히 달랐으니까요. 원작의 색과 분위기가 제가 알던 게 아니었어요. 당시 느낀 실망감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이런 복합적 실망감을 느낀 그는 당장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인쇄 선진국 독일로 떠났다. 월드컵이 한창인 2002년이었다. 그는 당시 두 달 가까이 유명하다는 인쇄소는 다 가봤다. 결과? 실망했다. 독일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나 홀로 연구 개발’을 시작했다. 인쇄기를 빌려 한 번 실험을 하는 데 400만~500만 원. 충무로와 을지로, 대구 남산동, 부산 동광동 등 전국의 인쇄소를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돌아온 건 인쇄소 블랙리스트에 오른 일뿐이었다. “인쇄를 한 번 하고 나면 기술자가 인쇄기 고무 롤러를 벤졸 묻힌 걸레로 닦아야 돼요. 그래야 다음 인쇄를 할 수 있죠. 하지만 제가 하도 괴롭히니 기술자들이 걸레를 집어던지고 도망치는 거예요. 다신 찾아오지 말라며 화를 내기도 했죠. 그 무렵에 제가 한 일은 저를 잘 모르는 인쇄소를 찾아다니는 거였어요. 6개월 만에 1억 원을 쓰고도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죠.”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오베르-쉬르-우아즈의 교회’와 노트북상에서의 이미지를 대조 작업하는 유화.

한계에 다다를 즈음, 그는 부업으로 전단지를 제작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라 전단지의 힘은 막강했다. 닭이 맛있어 보이는 전단지를 만들었다. 색만 잘 쓰면 되니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일이 전단지업계를 휩쓸었다. 프로젝트 한 건에 수천만 원을 벌었다. 소문이 퍼져 다양한 일이 들어왔다. 얼마 후 미술계에도 소문이 퍼졌다. 지난해엔 류가헌갤러리가 그에게 성남훈 작가의 사진집 <연화지정(蓮花之井)>의 인쇄를 의뢰했다. 물론 이렇게 번 돈은 전부 ‘갤러리북’ 출간을 위한 인쇄 연구에 투입했다. 찍고 또 찍어내기를 반복했다. 일반 잉크로 표현하기 어려운 원작의 색감과 직접 그린 듯한 디테일을 재현하기 위해 종이와 잉크, 망점, 분판 등 전반에 걸쳐 기존과 다른 인쇄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명화의 붓 터치와 물감의 번짐까지 보이는 ‘갤러리북’은 그 덕에 탄생했다.
유화 대표는 아직 개인 인쇄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인쇄물을 내놓겠다는 집념으로 고된 작업을 이어간다. 얼마 전엔 ‘프린트 디렉터’라는 직함까지 만들었다. 이는 인쇄에 대한 모든 걸 확실히 하겠다는 의미다. 그에게 인쇄란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것과 같다.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총괄한다. 분업 시대라는데도 모든 걸 혼자 한다. 이쯤 되니 더 궁금해진다. 대체 어떤 공정이기에 그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였는지.
“대단한 건 없어요. 그저 노하우가 켜켜이 쌓인 것뿐이죠. 우선 인쇄 원판은 미술관의 원화와 노트북 모니터에 띄운 원화 이미지 파일을 눈으로 대조해 만듭니다. 하루 2~3시간씩 3일 동안 작업하죠. 가까이서 봤을 때, 떨어져서 봤을 때, 측면에서 봤을 때 등 최대한 원작과 똑같이 현장에서 색을 보정합니다. 물론 미술관 조명에 따라 원화가 어떻게 보이는지도 반영하고요. 이걸 마치면 노트북의 원본 파일을 사무실로 가져와 인쇄물에 적용합니다. 이 작업에만 6개월이 걸리죠. ‘갤러리북’을 작업할 땐 안료를 특수한 방식으로 쓰고, 종이 단면에 미세한 층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눈이 그 층과 색을 입체로 착각하게 되거든요.” 사실 그는 지난봄에 출간한 ‘갤러리북’의 인쇄 퀄리티를 이미 7년 전 완성했다. 하지만 당시엔 책 한 권의 가격이 10만 원 정도로 비쌌기에 출간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같은 기술을 더 낮은 비용으로 구현하기 위해 7년이란 시간이 걸린 셈이다.






1 고흐의 명화 23점을 담아 지난 3월 출시한 갤러리북 시리즈 1권.
2 유화물감의 질감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갤러리북의 ‘자화상’ 페이지.

“인쇄한 그림이 원화와 가까울수록 가격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만큼 기술과 노력, 시간이 들어가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책한 권에 2만8000원까지 가격을 떨어뜨렸어요. 장당 1만 원이 넘는 아트 포스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요. 심지어 이미지를 한 장씩 뜯어 액자에 걸거나 벽에 붙일 수도 있습니다.” 출간 후 약 8개월이 지난 ‘갤러리북’은 이제껏 4000권 정도 팔렸다. 엄청난 적자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는다. 한국 시장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으로 그는 곧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도 간다.
첫 작업 이후 무려 15년이란 시간이 걸려 탄생한 ‘갤러리북’은 앞으로 클로드 모네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구스타프 클림트 등의 명작을 선보일 계획이다. 그에게 좋은 인쇄란 무엇인지 묻자 이런 대답이 나온다. “제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책을 만들었을 때 처음엔 다들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결국은 그 정성을 알아줬죠. 전 앞으로도 많은 책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수는 적어도 최선을 다해 좋은 책을 만들고 싶죠. 여기에 하나 더하면 앞으로 좋은 책을 만들어 어린이들이 그림을 있는 그대로 즐기게 하고 싶어요. 미술관에서 명화를 실제로 못 보는 전 세계 어린이를 위해 좋은 책을 만드는 거죠. 우리 같은 세대는 어릴 적 명화를 많이 접하지 못해 어른이 되어서도 그걸 잘 즐기지 못하잖아요. 하지만 지금의 모든 어린이가 명화를 쉽게 즐긴다면 미래엔 세상이 바뀔 거예요. 최고의 인쇄장이가 되겠다는 꿈은 없어요. 동화책 속 모든 그림이 진짜 그림 같은 세상을 만들고 싶을 뿐이죠. 오래전, 고흐도 말했죠. ‘나의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고요.”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JK(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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