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오라 손짓하네

브릭스 2020.01.15 10:29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굿바이 플루토 #6

굿바이 플루토 #6

 ‘나를 오라 손짓 하네’의 장소들이 있다. 해가 와 쉬는 곳, 달이 첫 치마폭을 푸는 곳, 허리 구부정한 인간이 삼백 예순 날 개펄 위를 기는 와온 바다. 곽재구 시인의 『와온 바다』를 그저 그런 시집 한 권 읽었다 생각하며 책장에 얹어 두고 몇 년 후, 와온 바다로 오세요, 시인의 목소리가 은은하고도 완강하게 마음을 꼭 쥐었다. 순천 터미널, 늦은 아침 첫 끼는 어느 먼 날 전설처럼 불어 와 닿던, 내어 놓은 접시들이 자리를 못 잡고 겹겹이 포개어진 밥상이 아니었다. 그저 그런 김치찌개에 종로 여느 밥값을 지불하고 아주 오래 버스를 기다려 와온 바다 앞에 내렸다. 개펄을 기어 다닐 기력을 다한 듯 보이는 노인 몇이 바닷가 앞 와온 슈퍼 평상에 앉아 해와 더불어 눈꺼풀을 쉬고 있었다. 나는 맥주 두 캔을 놓고 그들 곁에 앉았다. 무언가 몇 마디 그들이 물었고, 뭐라 몇 마디 내가 대답했지만, 분명 그 물음에 그 대답이 아니었다. 나도 그들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전설보다 먼 삼국시대에 세 나라가 그토록 싸움질을 하며 살아간 이유가 있었다. 통역이 필요했구나. 해가 쉬어 가는 빈 방조제를 두 시간쯤 거닐다 버스를 타고 순천 시내로 돌아왔다.

 버스가 다니기는 하는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 여수 가까이 여자만汝自灣까지는 택시를 탔다. 곽재구 시인이 쓴 시처럼 꽃상여는 지나가지 않았지만, 머리 희끗한 사내들이 전어를 구워 소주를 마시기엔 너무나 추운 계절이기도 했지만, 달이 아직 풀지 못한 치마폭을 푸는 듯, 사람의 길과 사람을 에워싼 모든 것들의 길이 여자만 감빛 하늘 아래 만나고 있었다. 이래서 나를 오라 손짓을 했군요. 그런데 오라고는 했지 어찌 돌아가라고는 말해 주지 않아, 버스 정류장에서 세 시간을 떨었다. 신발이 얼고 점퍼와 살결이 내 것처럼 여겨지지 않을 때쯤, 그러니까 상여가 가는 하늘 길이 반쯤 열릴 때쯤 순천에서 여수로 돌아가는 택시를 만났다. 택시에 앉아 생각했다. 여수도 나를 불렀을까? 일단은 아무 게장집 앞에서나 내려 달라 했다. 기사가 내려 준 곳은 익히 들어 온 두꺼비, 황소 유의 이름이 아니라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되는, 그래서 인간의 이름, 여진식당. 꽃게들이 해변에 줄지어 서서 커다란 집게발을 흔들며 나를 오라 손짓했다. 

 새조개 샤브샤브, 갓김치, 향일암, 마래터널. 나를 부르는 것들에 종종걸음으로 어스름까지 화답하고 광주행 버스를 탔다. 엑스포는 나를 오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대전 사는 꿈돌이도, 도우미도 다 기억하기 때문인지, 그래서 아이큐와는 상관없이 돈만 쓰게 하는 과학상자 같은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날까 기분이 상했던 건지, 손길도 눈짓도 보내오지 않았다. 그리고 광주터미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아래층 아주머니였다. 천장이 새고 있다고, 아무래도 그쪽 집 보일러가 터진 것 같다고. 광주터미널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서울행 버스를 탔다. 열쇠 가게 아저씨, 보일러 가게 아저씨, 우리집 현관문을 뜯어 주세요, 물이 터졌어요. 심야 버스에 누워 편안한 무언가를 계획했던 사람들의 기대가 어긋나고 있었다. 그러나 들리지 않나, 한 겨울, 우리 집 보일러가 터지는 소리가.

동명동 카페 레스토랑, 코발트
오만철 도자회화 특별전 〈5·18의 영혼 도자회와와 만나다〉 _ 윤상원
오만철 도자회화 특별전 〈5·18의 영혼 도자회와와 만나다〉 _ 박기순

 에이, 그런 건 모르겠고, 다시 호텔을 나서 문 닫힌 대인 시장 상가 사이를 헤매 아직 문을 연 머릿고기집을 찾아냈다. 고기 한 접시와 막걸리를 시켰다. 두 잔쯤 비웠을까, 바지 종아리께 공사장 먼지가 덜 털린 사내들이 얄팍한 섀시 문을 열었다. 방위비분담금 얼마? 뭐 몇 조? 그랬잖은가,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고, 일본 놈이 일어선다고. 지금이 딱 그짝 아니냐. 60대쯤 됐을까, 이곳에선 저런 말들이 참으로 평범하게 나오는구나. 배가 불렀지만 이왕 앉은 거 막걸리 한 병은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냉장고 문을 열자 주인아주머니가 처음 가져 온 만큼의 고기를 접시에 얹어 주었다. 아까는 고기를 많이 줬는디, 비개가 더 맛있어. 저, 죄송하지만 너무 많이 남길 것 같은데요. 뭐시 걱정이여, 싸 가면 되지. 내일 먹어. 안 상혀. 

이만큼 시킨 게 아니라 이만큼 남았다

 뭐시 걱정이여. 상행 프리미엄 버스도 어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양떼의 바이브레이션으로 내 등과 귀를 간질인다. 논산 어딘가, 화물차가 엎어져 한 시간 가까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잠이 오질 않는다. 목이 불편하다. 진드기에 물린 아픔은 진드기에 물려 봐야 알지, 모기에 물려 본 걸로 내 니 아픔 안다 말하면 안 돼부러. 겨, 안 겨? 내가 아파 봐야 남 아픈지 알지, 아픈 기는 공감하는 게 아니랑께. 뭔가, 이 말투는, 불편한 등을 뒤척인다. 문득 인간이 지나쳐 온 폭력과 공포는 사실 고작 진드기 같은 것들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거대한 악의 실체는 평범한 선보다 하찮을지 몰라. 평범한 선은 사람을 살릴 수 없지만, 하찮은 악은 사람을 죽이지. 그런 게 무서운 거다. 끝끝내 죄책감을 알지 못할 순수한 흡혈. 

 도착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반 늦어지고 있다. 어쩐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 불안하다 했더니, 교통사고. 남의 사고라고, 내 등 쑤시는 것만 생각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잠시 나를 하찮게도 만들지만 그래도 광주에서 배워 온 게 있다면, 거대한 아픔도, 기억도, 극복도 아닌, ‘뭐시 걱정이여’. 어쩌면 나도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한 자리를 지켜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 내 책임과 내 걱정에만 싸여 살아가다가도, 그게 ‘뭐시든’ 짊어져야 할 게 생긴다면 기꺼이 짊어질지도 모른다. 내 위대한 인간성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흡혈보다도 하찮고 평범한 내 안의 선이라 할 만한 것 때문에.  

글/사진 이주호

여행 매거진 BRICKS의 편집장.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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