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이 산다

별일 없이 산다

브릭스 2020-01-23 16:22:13 신고

여행 매거진 BRICKS City

탄자니아에서 청춘을 #6

해외에서 삶을 꾸려 나간 지 햇수로 8년째가 되었다. 그동안 나만큼 해외에 잘 적응해서 사는 사람도 없을 거라 자부했건만, 말라위를 거쳐 탄자니아 시골생활 3년차가 되자 더 이상 이런 환경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쉽지 않은 일에서 가끔 오는 보람으로 버텼는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위안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럴 줄 알고 이번엔 그림 일기장과 색연필도 가져왔는데 이것도 할 맛이 안 난다. 책을 덮은 지는 오래되었다. 심지어 활력소가 되는 요가마저도 한 달째 중단. 일하는 시간 빼고는 살아있는데 죽어있는 것 같은, 숨만 쉬고 있는 무기력함. 이곳에서의 삶은 “개 핵 노 잼”이다.  

너희처럼 코드 맞는 친구 딱 한 명만 있었어도 이리 지루하진 않을 텐데.

오랜만에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는 도중 정전이 되었다. 불은 금세 들어왔지만 친구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보며 재미있다고 웃는다. 도시를 사랑하는 내가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냐며 묻는다. 나도 어이가 없어서 같이 웃었다. 정전이 아무렇지도 않은 곳. 이런 환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정전이 가끔 길어지면 집 밖으로 나가 몇 분 정도 서성인다. 드문드문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빼고는 세상이 고요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달빛 한 점 없는 날이면 내 감각에만 의존해 몇 걸음 걸어보고, 하늘에 뜬 별도 세어본다.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자연인이 따로 없다.  

요즘 내가 맛들인 구황작물 ‘카사바’ 튀김. 자신의 마을에 온 손님이라며 두 개를 선물로 받았다.

다음엔 최소 중진국 혹은 수도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한 요즘. 간만에 혼자 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 이어폰을 꽂고 있다는 건 “나에게 말 걸지 말라”는 암묵적 요구다. 이곳에선 거기에 응해주는 법이 없다. 나의 사색을 방해하며 말 거는 사람들. 옆에서 깝죽거리며 괜히 말 한 마디 해보고 싶어 알짱거리는 그 꼬라지에 인상을 팍 쓰며 무시하고 걷는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라삐끼(친구)!”를 외치며 반갑게 맞아주는 이들도 있다. 가고 싶지 않지만 살기 위해 가는 곳. 바로 재래시장이다. 

2~3천 원의 행복. 제철을 맞이한 호박과 수박이 나의 주식이다.

대형 마트에서 정찰제로, 아무런 방해 없이 원하는 것을 한꺼번에 살 수 있는 환경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곳의 재래시장은 정신없고 산만하며, 그닥 발길이 가지 않는 혼란의 장소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에는 그런 마트가 없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흥정마저도 귀찮은 나는 시장에 가면 시세를 다 안다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도 안 되는 가격의 돈을 건넨다. “여기 엘프모자(500원)!” 내가 가격 먼저 물었다면 그들은 한 3천원을 불렀겠지만, 황당한 표정으로 말한다. “노~! 라삐끼(친구), 이거 엘프모자 아니고 엘프타투(1500원)라고!”

주말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집 청소를 하고, 세탁기가 없기 때문에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곤 발로 밟으며 빨래를 한다. 햇빛 쨍쨍한 날씨에 빨래까지 널고 나면 힘이 없다. 바닥에 누워 땀을 식히곤 해질 무렵에 맞춰서 바다로 향한다. 해변에는 석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많다. 나도 자리를 잡고 1시간가량 앉는다. 

노을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시간

오늘도 이렇게 무료했던 하루가 지나가는 구나 생각하는데, 또 이런 시간을 방해라도 하듯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하바리(안녕)!” 그리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스와힐리어로 뭐라 뭐라 말을 한다. 대꾸 한마디 하지 않는 나에게 “왜 말이 없어?”라고 영어로 묻는다.  “내가 꼭 말해야 하니?” 신경질적으로 답하자 “라삐끼! 우린 그냥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이야” 라고 서운한 티를 낸다. 이건 반칙 아닌가? 표현 한번 기가 막히게 하는구나.

글/사진 김정화

인류학을 공부하며 국제개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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