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폼장] 『레베카』 저자 대프니 듀 모리에의 걸작 단편집 『인형』

[지대폼장] 『레베카』 저자 대프니 듀 모리에의 걸작 단편집 『인형』

독서신문 2020-04-02 16:21:30 신고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방 밖에서 들려온 발소리에 제인은 약간 전율을 느끼며 창문에서 돌아보았다. 거스리였다. 그는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바람 소리가 시끄러우니 창문을 닫으라고 명했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옷을 벗고 좁은 침상에 나란히 말없이 누웠다. 아내의 온기가 느껴졌지만 거스리의 마음은 그녀와 함께 있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껍데기만 아내 곁에 갇혀 있을 뿐 알맹이는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제인은 그가 떠나감을 느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남편의 손을 밀어내고서 그가 들어올 수 없는 자신만의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서로의 품 안에서 함께 잠들었으나, 영혼이 사라지고 잊힌 지 오래된 무덤 속의 죽은 생명들처럼 따로따로였다. <13∼14쪽>

예지력을 지닌 듯 광기 서린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여, 스스로 그 눈빛에 빠져든 사람은 결코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과도 같았다. 그녀를 본 순간부터 나는 파멸할 운명이었다. <31쪽>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상기되어 새파란 눈동자를 밝게 빛내며, 벨벳 재질의 베레모를 옆머리에 살짝 얹은 채 승강장으로 내려왔다. “어머니, 어머니, 달링, 돌아와서 정말 행복해요, 정말 지독하게 행복해요!” 그러나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거의 실망으로 경악한 듯 그녀를 쳐다보더니, 이내 화가 나고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147∼148쪽>

“잘 있어, 달링.” 친구에게 애정이 깃든 키스를 하며 말했지만, 얼룩덜룩 일그러진 친구의 얼굴은 그녀의 내면에 깔깔 웃고 싶은 미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나 어쩜 이렇게 못됐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무언가 위로가 될 만한 작별 인사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그녀는 30분만 지나면 남편과 함께 있을 테고, 그에게 착 달라붙어서 자신을 모두 잊고, 다른 사람 걱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즐기고 있을 것이다. 문가에 서서 그녀가 얼굴을 환하게 빛내며 행복하게 말했다. “괜찮아. 오래가는 아픔은 없어.” <202쪽>


『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펴냄│328쪽│14,000원

* 지대폼장은 지적 대화를 위한 폼나는 문장이라는 뜻으로 책 내용 중 재미있거나 유익한 문장을 골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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