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포스트잇의 자세로

딱, 포스트잇의 자세로

ㅍㅍㅅㅅ 2020-04-06 12:48:41 신고

내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문구 덕후가 있다. 각종 펜부터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등등 덕질하는 장르도 다양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일종의 포스트잇 덕후다.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포스트잇을 모아 두고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포스트잇을 골라 사용한다. 내가 포스트잇을 사랑하는 이유는 가볍게 붙이고 뗄 때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보다 강력한 접착제를 만들기 위한 연구 과정 중 탄생한 수많은 실패작 중 하나. 접착력이 약해 끈적거리지 않아 사장될 뻔한 접착제가 되레 그 약한 접착력 때문에 문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걸작이 되었다.

 

옛날에는 나도 ‘강력 접착제’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매일 아침, 사무실에 도착한 나의 루틴은 일정하다. 제일 먼저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부팅되길 기다리며 포스트잇을 꺼내 <오늘의 할 일>을 적는다.

  1. 1. ○○와 통화
  2. 2. 피드백 받기
  3. 3. ☆☆ 진행 상황 체크
  4. 4. 물 5잔 이상 마시기
  5. 5. 퇴근할 때 △△챙겨가기

이렇게 업무적인 내용부터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일, 잊지 말아야 할 일까지 꼼꼼히 적어둔다. 완성된 <오늘의 할 일> 리스트는 노트북 오른쪽 귀퉁이에 붙여 놓는다.

업무 시간 동안 하나하나 클리어한 후 포스트잇의 리스트들을 지워간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까만 줄을 하나씩 그을 때마다 성취감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퇴근할 때는 노트북의 전원을 끄면서 포스트잇에 남은 <오늘의 할 일>이 없는지 점검한다. 오늘 다 못 이룬 건 내일 붙일 포스트잇에 적은 후 노트북 사이에 끼워 두고 퇴근한다.

‘강력 접착제’처럼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인간관계도, 사회생활도… 원하는 걸 손에 넣으려고 ‘열심’과 ‘노력’이란 접착제로 악착같이 붙였다. 부족한 능력은 잠을 쪼개가며 마련한 시간으로 매웠다. 성실하고 우직하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될 줄 알았다.

강력 접착제처럼 악착같이 들러붙을수록 내 안에서는 더 큰 기대와 더 큰 성과에 대한 기대가 자라났다. 노력과 시간을 100 정도 투자했다면 내 안에서는 작은 울림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모질고 끈덕지게 노력했는데… 120 정도는 돌아오겠지?

도둑놈 심보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삶의 수학 공식은 =만 되어도 성공이다. 현실은 늘 + 가 될 확률보다는 -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그걸 몰랐던 어린 날의 난 늘 결과에 좌절했고, 절망했다. 내가 투자한 진득함의 결과는 ’ 미련‘이라는 찐득한 찌꺼기가 덕지덕지 붙은 지저분한 상태로 돌아왔다.

 

소임을 다하면 미련 없이 떨어지는 ‘포스트잇’처럼

어느 날, 노트북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면서 생각했다.

그래 딱 포스트잇의 마음 정도면 되는 건데…
뭐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그리 악착같이 들러붙었지?

때로는 포스트잇 같은 자세로 사는 것도 중요하다. 필요할 때는 딱 붙어 있고, 임무를 다하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스르륵 떨어지는 포스트잇처럼. 잘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다 하고 나면 미련 하나 남기지 않고 돌아서는 자세. 그게 나한테 필요했다.

매일 아침 포스트잇을 붙이며 주문처럼 말했다. “오늘 하루도 포스트잇처럼 살자.” 그날 저녁, 포스트잇을 때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 포스트잇처럼 가볍게 살았어?” 분명 그런 날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실망하지도 않았고, 그랬다고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경쾌한 리듬으로 살아갈 뿐이다.

무거운 책임감이나 묵직한 사명감에 짓눌려 스스로를 괴롭히던 뜨거운 열정은 사라졌다. 그 빈자리에 몸과 마음의 여유가 천천히 채워졌다. 몸은 건강해졌고,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나라는 사람은 강력 접착제처럼 사는 것보다 포스트잇처럼 사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알게 됐다.

과거의 나처럼, 성향이 포스트잇 재질이면서 ‘강력 접착제’인 줄 착각해 자신을 괴롭히며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만든 그 끈적한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자신의 재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

지금까지 강력 접착제의 자세로 살아 봤는데 그게 아무래도 안 맞는다면, 삶의 자세를 바꿀 타이밍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포스트잇의 자세도 좋고, 딱풀의 자세도 좋고, 스프레이 접착제의 자세도 좋다. 과연 난 어떤 재질일까?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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