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폼장] “금이 가고 깨지더라도 오롯이 살아야 해” 『세상을 담고 싶었던 컵 이야기』

[지대폼장] “금이 가고 깨지더라도 오롯이 살아야 해” 『세상을 담고 싶었던 컵 이야기』

독서신문 2020-07-04 16:23:00 신고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강가 풀숲 미루나무 아래에 컵이 놓여 있다. 
입이 크고 둥근 머그컵. 한 뼘이 채 안 돼 보이나 반 뼘은 훌쩍 넘어 보이는 높이를 가진 머그컵. 두 손으로 감싸 쥐면 몸통이 마침맞게 손바닥에 감길 것 같은 둘레를 가진 머그컵. 안쪽을 들여다보면 바닥이 깊고 품이 넓어 까다롭지 않게 무언가를 품어 안을 수 있을 것 같다. 제아무리 모가 난 것일지라도 안에 담기기만 하면 둥글둥글 둥글어지고야 말 듯 하다. 머그컵의 옆구리엔 하트의 반을 잘라 붙인 것 같은 손잡이가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곡선을 이루며 달려 있다. 

이 반절의 하트 사이에 검지와 중지를 넣고 손잡이 윗부분에 엄지를 얹어 살짝 들어 올리면 가뿐하게 올려질 컵.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가볍게 적시며 안에 품고 있는 걸 아낌없이 내어주었을 컵. 하지만 지금은 그저 강가 풀숲에 놓여 있는 컵. 어떤 즐거운 걸음을 따라 나왔다가 혼자 남겨지게 된 컵. 자신을 깜빡 두고 멀어져갔을 발소리를 까막까막 들었을 컵. 

이 머그컵의 이름은 커커다. 혹여 컵에게도 이름이 다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자신이 아끼는 개인용 컵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거나 먹고사는 일이 바빠 소소한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어쩌면 고정관념을 깨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고, 어떤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상관없다. 지금 강가 풀숲에 누군가 두고 간 머그컵이 있고, 그 머그컵의 이름이 커커라는 게 중요하다. 커커는 갑자기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지게 됐으니까. 바깥세상으로 나와 갑자기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진짜 쓸모없는 존재가 있을까? 사람의 입술 안쪽에 따뜻하고 감미로운 것들을 내주고 때로는 차고 시원한 것들을 내주었을 컵 커커. 커커는 지금 강가 풀숲 미루나무 아래에 놓여 있다. 정확히는 미루나무에서 강물 쪽으로 열두 발짝쯤 앞에 놓여 있다. 

‘이젠 뭘 담아야 하지? 이젠 뭘 내줘야 하지?’ 

커커는 문득 뭉게구름을 둥실, 담아본다. 연한 햇살과 연둣빛 풀냄새를 남실남실, 채워본다. 강바람 소리를 둥글게 굴려보고 강물 소리를 동그랗게 품어본다. 이 기분 이 느낌은 뭘까? 물이나 커피같이 일상적인 것만 담아왔을 컵. 그대가 사랑하는 이의 입술보다도 그대의 입술에 더 많이 닿았을 컵. 컵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컵 안에 이야기를 담을 순 없을까?’ <6~9쪽>

『세상을 담고 싶었던 컵 이야기』
이영근 지음│에듀니티 펴냄│308쪽│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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