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필 무렵, 삼가헌

연꽃 필 무렵, 삼가헌

노블레스 2020-08-08 17:00:00 신고



삼가헌은 사육신 충정공 박팽년의 11대 후손 박성수가 1769년에 집을 지으며 붙인 이름이다. <중용> 9장에서 중용 실천의 어려움을 강조한 공자의 말(子曰 天下國家 可均也, 爵祿 可辭也, 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을 빌려 그가 집을 지을 때 당호로 그 이름을 썼다. 중용에서 얘기한 ‘삼가’, 그 뜻을 직역하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벼슬과 녹봉을 사양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을 수 있다’다. 공자는 “이 세 가지는 가능하나 중용은 불가하다”며 중용 실천의 어려움에 빗대어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知, 仁, 勇)을 강조했고, 박성수는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아 실천의 의지를 다졌다. 삼가헌은 박성수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박광석, 박광석의 손자 박규현 등 4대에 걸친 100여 년 동안 완성해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중요민속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된 이곳에는 박팽년의 후손인 박도덕과 부인 정평화가 실제 거주하고 있다. 고택의 주인 박도덕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집과 함께 많은 세월을 보내고야 비로소 한옥에 담긴 선조의 지혜를 실감한다고 말한다.




“대개 한옥은 폐쇄적인데 남부 지방은 이보다 조금 더 개방적인 구조입니다. 여름에는 삼가헌 안채 마루에 난 창문만 열어도 산바람이 들어옵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열린 ㅁ자형 구조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반듯하지 않고 벽과 축대가 미묘하게 살짝 좁혀지는 형태로 지었어요. 집으로 들어온 산바람이 좁힌 공간을 통해 더 세지고, 덕분에 공기가 집 안 곳곳에 잘 돌게 되죠. 별당채인 하엽정은 또 다른 목적으로 반듯하게 짓지 않았습니다. 그걸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날 하엽정 누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다 그 이유를 깨닫고 무릎을 쳤습니다. 만약 기둥과 벽을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세웠다면, 집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앞산에 막혀 지금처럼 시야가 트이지 않았을 거예요. 스크린을 향해 좌석을 비스듬하게 놓은 요즘 영화관처럼 집 앞의 경치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도록 미세하게 기울여 지은 겁니다. 이런 걸 ‘차경’, 즉 바깥의 경치를 집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하죠. 삼가헌의 하엽정은 일본이나 중국 정원과 달리 한옥의 담을 낮춰 바깥 경치를 내 집 정원처럼 끌어 쓴 한국식 전통 정원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입니다. 단순히 담을 낮춰 정원을 꾸린 식이니 실리적이면서도 큰 지혜가 깃든 곳이기도 하죠. 바깥 풍경은 마을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고, 만물을 내 것이 아닌 우리 것으로 인식한 옛 선조의 마음가짐을 새삼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재미난 점은, 바깥 담장과 달리 안채와 사랑채의 담장은 제 키보다 훨씬 높게 지었다는 겁니다. 일종의 ‘내외담’인데, 밖에서는 물론 안채와 사랑채를 쓰는 남녀 사이에도 쉬이 들여다볼 수 없게 한 것이죠. 삼가헌은 여느 전통 한옥과 달리 안채와 사랑채가 비교적 가까이 붙어 있는 구조라 이 내외담의 역할이 더욱 돋보입니다. 또 집 안에 굴뚝을 두는 대신 기단에 구멍을 뚫어 연기를 바닥에 깔아 병충해를 막고, 춘궁기에 배고픈 백성을 연기로 자극하지 않은 양반가의 배려도 엿보이고요. 삼가헌을 지을 때 집 안에 기와터를 만들어 해결하고, 이것을 마을에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미덕도 보입니다. 이처럼 집 안에 있는 축대 하나, 기왓장 한 장까지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는 걸 삼가헌에서 오랜 세월 살아보니 알겠더군요.”




사랑채, 안채, 별당채와 연지로 구성된 삼가헌에서 특히 하엽정이라 이름 붙인 별당채는 삼가헌을 더욱 각별하게 만드는 곳이다. 1874년 본래 ‘파산서당’으로 쓰인 일자(一)형 건물에 누마루 한 칸을 더 만들고, 안채와 사랑채를 짓기 위해 흙을 파낸 자리에 연못을 만든 이곳은 계절마다 다채롭게 자연의 옷을 입고 벗으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긴 장방형의 못 한가운데에는 동그란 섬을 두었는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동양의 우주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여기에 누마루에 앉은 사람까지 더하면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인 ‘천지인(天地人)’이 완성된다. 특히 8월 즈음에는 짙은 초록의 연잎 사이사이에 분홍빛 연꽃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 가히 한순간도 풍류를 놓지 않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일상을 짐작할 수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연못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허투루 심지 않았다.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덕에 하엽정 누마루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듣는 삼가헌 현 주인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하엽정은 각 방에 붙인 이름처럼 ‘읍치’와 ‘영향’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즉 자연의 온갖 아름다운 경치를 끌어들여, 그 향기에 마음껏 취할 수 있는 곳이죠. 하엽정 주변을 둘러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저마다 풍성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어 날씨 좋은 날에는 누마루에서 앉아 그것들을 보며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삼가헌 대문 옆에 있는 200년을 넘긴 굴참나무엔 흉년이 들었을 때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 나눠 먹겠다는 양반가의 구휼 정신이 깃들어 있고, 도무지 기념으로 심었을 것 같지 않은 탱자나무는 그 연유를 다시금 찾아보게 되는 재미가 있습니다. 양반가에 빠지지 않았던 매화나무는 본래 것을 일부 남겨 어렵사리 다시 살려 키우는 보람이 있고요. 제가 결혼할 때 심은 배롱나무에 백일홍이 피고, 연못 한편의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어 초록잎과 색 경합을 벌이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곳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곧 연잎과 연꽃으로 하엽정 연못의 경관이 절정에 달할 것이다. 삼가헌이 방문객으로 가장 몸살을 앓는 때이기도 하다. 선조의 지혜가 깃든 삼가헌을 지키고자 하는 현 주인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대문을 들어설 때 가벼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 예의, 엄연한 살림집인 삼가헌의 사생활을 생각하는 배려, 선조의 지혜가 담긴 문화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양반가뿐 아니라 어느 집에서나 당연히 지켜온 우리나라의 예의범절이다.


달성 삼가헌 고택 방문 안내
위치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15
문의 053-668-2174(대구 달성군 문화체육과)
방문 시간 별도 지정되어 있지 않으나, 고택 주거자의 사생활 고려 바람.
기타 관광 정보 www.dalseong.daegu.kr/new/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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