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의 극적 서사
유니버설발레단을 대표하는 6명의 수석무용수를 만났다. 오랜 시간 단련한 몸의 온도는 작품 <오네긴> 을 소화하기 위해 또 한 번의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왼쪽부터) 현준이 입은 재킷 오디너리 피플 가격미정, 미선이 입은 드레스 지고트 128만원.
(왼쪽부터) 향기가 입은 톱 레하 19만8000원, 코르셋 에디터 소장품, 유희가 입은 톱 레하 21만5000원, 스커트 드리스 반 노튼 가격미정,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입은 팬츠.
손유희어머니를 따라 에어로빅을 다니면서 춤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다. 프랑스 유학 도중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을 결심한 그는 오디션을 보고 객원 활동을 시작해 수석무용수가 되기까지 모든 단계를 차근히 밟았다. 손유희는 <오네긴> 작품에서 몰입되는 장면으로 3막을 꼽았다. 오네긴이 그레민 공작의 아내가 된 타티아나를 보고, 그녀를 향한 마음을 깨달아 편지를 들고 타티아나의 방을 찾아오는 부분이다. 오네긴을 본 순간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회상과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태연한 척하는 그녀의 모습이 스토리 전개에 있어 중요하다 여겼기 때문. 강미선어린 시절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무용학원에 다녔다. 당시 발레반 언니들을 보며 무용수의 꿈을 키웠다.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 선화예술중·고교 그리고 워싱턴 키로프발레아카데미를 거쳐 2002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다. 깊은 이해도를 갖춘 춤을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매일 훈련한다. 강미선이 <오네긴> 작품에서 꼽은 가장 몰입되는 장면은 3막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만남과 이별 부분. 후회와 갈등이 담긴 절절한 시퀀스가 인상적이다.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수석무용수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발레에 발을 디뎠다. 러시아 출신으로 2004년 유니버설발레단 단원에서 시작해 솔리스트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오네긴> 에서 올가의 약혼자인 렌스키 역을 맡은 바 있는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는 가장 몰입되는 장면으로 2막 렌스키의 솔로 장면을 꼽았다. 오네긴과 렌스키의 결투 전에 나오는 장면으로, 절망감을 표현한다. 기존 클래식 발레의 테크닉과는 다른 동작 속에 내적 심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미선이 입은 톱 코스 4만9000원, 코르셋 에디터 소장품, 브리프 드리스 반 노튼 가격미정, 링 보테가 베네타 96만원.
홍향기6살 때 그림을 배우러 미술학원에 등록했는데, 그림은 안 그리고 위층에 있는 발레학원만 구경했다. 이 모습을 본 미술학원 선생님이 부모님께 알려 발레를 시작하게 됐다. 대학교 졸업 후 개인 오디션으로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한 그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평일엔 저녁 약속을 잡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한다. <오네긴> 에서 타티아나의 동생 올가역을 맡았던 홍향기가 꼽은 가장 몰입이 되는 장면은 2막 1장 후반부부터 2막 2장까지의 서사다. 오네긴이 올가의 약혼자인 렌스키를 도발하기 위해 올가와 춤을 추고, 질투심에 불탄 렌스키가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리고 오네긴의 총에 맞아 렌스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감정신이 주를 이루는 장면에 크게 몰입됐다. 이동탁마이클 잭슨을 좋아하던 학창 시절, 마이클 잭슨을 뛰어넘고 싶어 다리 찢기를 연습하기 위해 한국 무용을 하던 이성 친구를 따라 무용학원을 방문했다. 당시 학원에서 보여준 바리쉬니코프의 발레 비디오가 인생을 바꿨다. 이동탁은 <오네긴> 에서 3막 그레민 공작의 아내가 된 타티아나를 보며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깨달은 오네긴의 과거 회상 신을 가장 몰입되는 장면으로 꼽았다. 타티아나를 만나러 가기 위해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는 모습에 감정이 동요됐다. 이현준사촌 강예나의 발레 공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으신 부모님이 백댄서를 꿈꾸던 초등학생에게 발레를 시키셨다. 처음 발레를 가르쳐주신 분이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계시다 몇 해 전 은퇴하신 황재원 선생님이다. 때문에 유니버설발레단 입단의 꿈은 자연스러웠다. 이현준은 <오네긴> 에서 가장 몰입되는 장면으로 오네긴이 렌스키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는 장면을 꼽았는데, 이유는 마치 실제 인생을 살아가면서 후회하는 일들에 대한 감정을 발레로 표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현준이 입은 재킷 우영미 가격미정, 향기가 입은 보디수트 막스마라 가격미정, 동탁이 입은 톱 지방시 가격미정, 브리프 캘빈클라인 언더웨어 4만9000원,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입은 팬츠 우영미 가격미정, 미선이 입은 재킷 로에베 가격미정, 벨트 알라이아 by 10 꼬르소 꼬모 서울 205만원, 유희가 입은 재킷 YCH 62만원, 스커트 4 몽클레르 시몬 로샤 가격미정, 이어링 빈티지 헐리우드 3만9000원, 오른손 링 코스 10만5000원, 왼손 링 코스 가격미정.
(왼쪽부터) 현준이 입은 톱 던힐 가격미정, 브리프 캘빈클라인 언더웨어 4만9000원, 네크리스 크롬하츠 가격미정,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입은 브리프 에디터 소장품, 이어링 우영미 가격미정.
몸에 나이테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일반인이 생각하는 발레리나의 가녀린 몸매에 대한 편견은 오해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가뿐한 점프와 긴 호흡에도 지치지 않는 체력은 탄탄한 근육이 필수일 거다. 수많은 발레리나들 중에서 손에 꼽는 위치에 올라선다는 것은 타고난 재능 외에도 끈질긴 노력과 성실함이 분명 필요했으리라. 이는 몸을 언어로 다루는 것에 대한 의미와도 직결된다.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비로소 무용수들의 시간을 이해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리가 부각되는 것이 부담스러워요.”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자 2017년도에 <오네긴> 의 주연인 타티아나 역을 맡은 발레리나 강미선과 나눈 첫 대화다. 작은 움직임에 놀랍도록 활기차게 반응하는 다부진 근육은 그가 발레리나로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예술 계통의 특성상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들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모든 단계를 거치지 않고 어린 나이에 수석무용수의 자리에 바로 발탁되는 경우가 있는데, 강미선은 군무에서 코르드발레, 데미솔리스트, 솔리스트, 그리고 수석무용수까지 발레단의 모든 과정을 거쳤다. 30년이 다 되는 시간 동안 연수단원, 준단원, 정단원이라는 계단을 차근히 밟아온 열정과 용기를 보여주는 몸은 그 인내의 시간을 반영하고 있었다. 손끝과 발동작 하나하나가 그의 계산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를 선두로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무용수 이현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이동탁, 손유희, 홍향기가 <싱글즈> 카메라 앞에 섰다. 12년간 수석무용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현준은 묵묵히 자신만의 연기를 시작했고, 콘스탄틴 노보셀로프는 이현준의 움직임에 따라 호흡을 맞췄다. 자연스러운 동작에서 나오는 표정은 깊은 고뇌를 담고 있었다.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에 뒷짐을 지고 현장을 바라보던 이동탁, 뚜렷한 주관으로 진솔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손유희,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현장을 읽어나가던 홍향기까지, 이들이 모여 작품 <오네긴> 을 만든다. 각자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달라도, 서로를 위한 배려와 존중은 몸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음이 느껴졌다.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발레의 특성을 본인들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오네긴> 은 드라마 발레의 거장으로 불리는 안무가 존 크랑코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하여, 크랑코 재단은 작품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공연권을 엄격하게 관리하기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은퇴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2009년 한국 발레단 최초이자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공연권을 획득했는데, 당시만 해도 <오네긴> 을 공연할 수 있는 단체는 전 세계에서 20여 곳뿐이었다. 세계적인 발레단으로 불리는 볼쇼이발레단조차도 그 이후 공연권을 획득했을 정도이니, 이만하면 유니버설발레단이 가진 세계적 입지는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유니버설발레단도 첫발에 공연권을 획득한 것은 아니다. 1992년 존 크랑코 재단에 처음 문을 두드린 후 18년 만에 얻어낸 성과다. 이는 작품성, 브랜드의 가치, 안무가의 명성을 유지하려는 재단만의 방침이기도 하다. 1965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세계 초연한 공연은 지금 영국의 로열발레단,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볼쇼이발레단, 라 스칼레 발레 등 20여 개 주요 발레단이 공연권을 획득해 공연하고 있다.
(왼쪽부터) 향기가 입은 톱 YCH 39만원, 팬츠 르메르 가격미정, 콘스탄틴 노보셀로프가 입은 톱 챈스챈스 가격미정, 셔츠 발리 가격미정, 팬츠 나이키 7만5000원.
(왼쪽부터) 동탁이 입은 톱캘빈클라인 언더웨어 가격미정,팬츠 오디너리 피플 가격미정, 니트 챈스챈스 가격미정, 미선이 입은 드레스 보테가 베네타 340만원, 유희가 입은 톱과 팬츠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 가격미정, 현준이 입은 팬츠 C.P.컴퍼니 38만9000원.
(왼쪽부터) 미선이 입은 드레스 지고트 128만원., 현준이 입은 재킷 오디너리 피플 가격미정, 브리프 캘빈클라인 언더웨어 4만9000원, 코르셋 에디터 소장품.
<오네긴> 은 누군가에겐 익숙한 작품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생소한 작품일 거다. 러시아에 사실주의 문학을 확립시킨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 을 원작으로 한 작품은 드라마 발레의 거장으로 불리는 안무가 존 크랑코와 작곡가 쿠르트-하인츠 슈톨제가 만나 차이콥스키의 여러 곡을 편곡해 만든 음악으로 구성된다. 클래식 발레에서 볼 수 있는 동화 속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감정을 보여주는 사실주의 장르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에서나 볼 법한 환상적인 무대 장치는 만날 수 없다. 일상 속 사랑 이야기를 발레라는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 이를 위해 소품 역시 단출하다. 나무, 울타리, 책상, 편지 등 주로 일상적인 소재다. 발레의 묘미로도 불리는 프리마 발레리나와 남성 제1무용수와의 춤을 일컫는 그랑 파드되, 극의 이야기와 상관없이 다양한 춤을 선보이는 디베르스 티망, 정형화된 마임 역시 과감히 생략한다. <오네긴> 은 러시아 상류층 지식인인 오네긴에게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순수한 소녀 타티아나의 풋풋한 사랑과,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는 오만한 오네긴의 엇갈린 사랑과 잔인한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타티아나를 향한 오네긴의 뒤늦은 사랑과 후회, 그리고 오네긴의 유혹을 뿌리치는 타티아나의 애절한 절규가 주를 이룬다. 현대판 버전으로 해석하자면, 좋은 집안을 핑계 삼아 뺀질거리는 남학생에게 반한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 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발레라는 장르로 승화시켰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결말은 비극이지만 말이다. 인물의 감정 표현을 특유의 스틸 포즈로 표현해 대중적 인지도를 끌어올린 부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연극적 해석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전 소설 속에서 흔히 회자되는 옛 로맨스에 별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발레리나들의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에너지를 바라보고 있자면 <오네긴> 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발레리나가 이야기하는 몸의 언어에 완벽이란 없다. 각자의 역량에 맞춰 소화하는 표현의 몸짓이 정답이 되고, 줄거리가 된다.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작품을 위해 단련한 무용수들이 펼치는 연구와 노력의 결과물은 2020년식 새로운 <오네긴> 으로 완성된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인 강미선, 손유희, 이동탁, 이현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홍향기가 주연으로 이끄는 드라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한 번의 무대를 위한 인고의 노력이 큰 파란을 불러오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