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일상의 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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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트렌드 2020-09-23 12:40:04 신고

누군가 여행은 비일상적인 경험을 위해 떠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나는 읽으러 갔다. 강릉으로
도서관을 콘셉트로 한 테라로사 경포호수점에는 벽에 각종 책이 빼곡하다.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 ‘들쿠레’는 맡아본 적 없지만 구들장 데우는 냄새처럼 구수할 것 같고, ‘푸들푸들 뛰어가는 바람’은 만난 적 없지만 꼭 ‘푸들푸들’ 뛰었을 것만 같다. 이처럼 문학적 표현은 사는 데 쓸모 있는 단어들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머리를 헤집어 퇴행된 감정들을 들쑤신다. 하늘은 높고 사색은 깊어지는 가을은 그래서 독서의 계절이다. 마감 때마다 매달 일주일은 꼬박 활자들과 씨름하는 탓에 글이 빼곡한 책과는 거의 담을 쌓고 사는 편이지만, 가을이 되면 확실히 책장에 새로운 책을 들여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주제를 야심 차게 ‘독서’로 잡았다.

미니 클럽맨 JCW

지식을 구하기 위해 숨 가쁘게 읽어 내려가는 책은 내 기준으로 독서라 하기 어렵다. 가을과 여행이란 명제에는 고작 한 문장을 읽고 덮어도 흐뭇한 에세이나 산문이 어울린다. 본격적인 독서 여행을 위해 책장에 묵혀둔 책 몇 권을 골라 조수석에 태웠다. 이번 여행을 함께할 차는 미니 클럽맨 JCW다. 콤팩트한 몸집이지만 왜건처럼 D 필러를 뽑아낸 덕에 적재 공간이 제법 넉넉하다. 게다가 존 쿠퍼의 정신을 잇는 JCW 배지까지 달아 최고출력 306마력, 최대토크 45.9kg·m의 화끈한 힘과 앞바퀴굴림의 역동적이고 민첩한 퍼포먼스를 갖췄다.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어떤 지루한 도로라도 금세 짜릿한 트랙으로 바뀐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은 이유는 바로 타협할 대상이 없다는 것. 클럽맨 JCW의 운전 재미 역시 타협이 없다.

테라로사 경포호수점은 강릉을 목적지로 정한 가장 큰 이유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이곳은 도서관 콘셉트로 마련됐다. 경포호수로 이어지는 작은 호수와 산책로가 에워싼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1층 공간을 가장 먼저 만난다. 기다란 커피 바를 가운데 두고 사방에는 테라로사에서 수집한 아트북이 전시돼 있다. 지하는 어린이 도서관, 2층은 책을 살 수 있는 한길서가 있다. 이곳에서는 테라로사만의 노하우로 미디엄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커피와 음료에 피낭시에, 브리오슈 등 간단한 베이커리 메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이미 유명한 곳이라 이른 시간에도 인적이 적지 않지만, 오전 시간에는 나름 여유를 즐길 수 있을 정도다.

실내도 멋지지만 날이 적당하니 테라스로 나갔다. 미리 주문한 커피와 책 한 권을 들고 테라스에 앉았다. 왼편엔 정혜선 작가의 작품이 그려진 테라로사의 콘크리트 벽면이, 오른편에는 연못 같은 호수가 있다. 전날 비가 내린 터라 잔잔한 수면 위로 물안개가 아른거렸다. 붓질에 쓸리고 물감이 엉겨 색채의 경계가 사라진 모네의 ‘수련’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책장을 넘긴다. 물에 젖은 나무 냄새, 약간의 습기가 스며들어 낙낙해진 종이의 감촉이 썩 나쁘지 않다. 쌀쌀한 기운이 시작될 즈음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넘기니 비로소 혼자인 채 충만해졌다.

‘망중한’을 보낸 지 얼마나 됐을까?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모이며 소란스러워졌다. 더 이상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카페를 나왔다. 이번에는 사천해변으로 가기로 한다. 여름 바다의 뜨거움보다 사람들이 떠나고 남겨진 가을 바다의 쓸쓸함이 좀 더 애틋하다.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다 차를 세우기 적당한 자리를 찾아 멈췄다. 클럽맨 JCW의 뒤쪽이 해변을 향하도록 주차하고 뒷자리를 접어 트렁크 공간을 하나의 작은 방으로 만들었다. 책장처럼 열리고 옷장처럼 닫히는 트렁크 도어는 이 순간 은신처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 등받이를 챙겨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공간에 구겨져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나무 책상 밑에 들어가 책을 읽던 것이 생각났다. 어느 날은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엄마는 내가 없어진 줄 알고 혼비백산이 돼 한참이나 동네를 뛰어다녔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 챙겨온 책들 중에 김서령 작가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꺼내 들었다. 배추적은 배춧잎에 밀가루 물을 묻혀 노릇노릇하게 부친 지역 음식이다. 이 책에서 김서령 작가는 안동 시골 양반가의 맏며느리였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인생의 통찰을 맛깔나는 문장으로 환원했다. 나의 외가도 안동이다. 덕분에 난 배추적의 삼삼한 흙 맛과 단맛을 진즉에 알았다. 내게 배추적은 엄마의 맛이자, 내 엄마의 엄마의 맛이었다.

클럽맨 뒷자리를 접으면 나만의 오붓한 책 읽기 공간이 마련된다.

책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세계를 엿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안의 묵혀진 기억과 생각을 끌어 올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구태의연한 문장 속에서 시선이 멈추는 곳은 언제나 제 마음이다. 김서령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깊은 허기가 들었다. 마침 근처에 두부촌이 있다. 맷돌에서 뽀득뽀득 피어난, 백석의 언어처럼 ‘히수무레하고 살갑고 부드러운’ 초두부를 먹으러 가야겠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글_장은지

CREDIT
EDITOR : 서인수 PHOTO : 최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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