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요즘 너랑 숙제하는 시간이 제일 좋더라

엄마는 요즘 너랑 숙제하는 시간이 제일 좋더라

베이비뉴스 2020-09-25 14:24:00 신고

큰아이는 9월 1일 초등학생이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초등교육을 준비하는 과정인데 배우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초등학교 1학년과 비슷하다. 한국에 있을 때 매년 3월이면 초등학생 1학년이 되는 아이를 둔 부장님, 차장님들이 한 달 휴가에 들어가곤 했다. 아이의 초등학교 적응을 곁에서 도와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그땐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나의 일이 되고 보니 온몸과 마음으로 이해가 된다. 

◇ 드디어 초등학생, 이제 널 ‘코딱지’라 부르지 않으려고 해

입학하던 날 의미심장했던 너의 웃음. ⓒ김보민 입학하던 날 의미심장했던 너의 웃음. ⓒ김보민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내가 더 호들갑이다. 첫아이 낳기 직전 출산 준비물 사던 마음으로 학교 준비물을 챙기고 연필 한 자루까지 이름표를 붙여줬다. 아이의 학교생활을 응원하는 내 마음을 모두 준비물 준비에 쏟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아이가 초등 과정에 들어갈 무렵이 되니 아이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팔다리도 더 길어진 것 같고,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도 어른스러워진 것 같고, 아기 같은 행동이나 표정도 얼굴에서 사라진 것 같다. 

등교 첫날, 교문을 나오는 아이를 만나 집에 오는 길에 내 입에서는 질문이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첫 질문은 “어땠어?”였고, 선생님은 어땠는지, 친구들은 어땠는지, 교실은 예전과 많이 다른 느낌이었는지, 학교 준비물은 제자리에 잘 챙겨 뒀는지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기다린 서너 시간 동안 궁금했던 모든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응, 다 좋았어.” 

아이의 시시한 대답을 듣고 나 혼자 너무 흥분했구나 싶어 간식이나 먹고 집에 가자며 빵집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그나마 아이가 ‘좋다’는 표현을 해주어 안심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초등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첫 등교 며칠 후 아이 알림장에 숙제가 쓰여 있었다. 알파벳 자음과 모음 조합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학교에서 배운 소리를 복습하는 게 매일 해야 하는 숙제였다. 저녁을 먹기 직전 둘이 식탁에 나란히 앉아 그날의 숙제를 한다. 내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면 아이는 소리를 낸다. B와 D, E와 I는 언제나 헷갈리는 소리이고, 틀린 소리를 내고 나면 지우개로 소리를 지우듯 허공에 손사래를 치고 다시 소리를 뱉는다. 

공책 한쪽을 읽고 나면 십 분이 훌쩍 흐른다. 그때부터 아이는 한쪽 엉덩이를 들썩이고, 팔다리를 흔들거나, 주변 소리에 반응하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다, 필요도 없는 연필을 찾는다고 방에 들어갔다 나오거나, 느닷없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준다.

저녁 준비도 해야 하는 나는 1초라도 빨리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데 아이는 태평천하다. 다음 페이지에 집중하라고 아이를 다그쳐 간신히 숙제를 마무리한다. 학교 공책을 책가방에 잘 넣어두고 놀라고 하니 아이는 솟아오르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한달음에 들어간다.

◇ '꾸준함'을 배워가면 좋겠는데… 말보다 삶으로 엄마가 알려줄게 

아이와 함께 숙제하는 시간이 24시간 중 가장 감동적인 시간이다. 아이가 세상을 배우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니, 설렌다. ⓒ베이비뉴스 아이와 함께 숙제하는 시간이 24시간 중 가장 감동적인 시간이다. 아이가 세상을 배우는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니, 설렌다. ⓒ베이비뉴스

칙칙 소리를 내는 밥솥을 슬쩍 보고 썰다 만 채소를 썰어 고기와 볶으며 갑자기 마음이 울렁거렸다. 책이든 공책이든 책상 위에 펼쳐 두고,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자기만의 언어로 들은 내용은 풀어헤쳐 다시 조합해 기억하고, 배운 내용을 입말로 내뱉어 보기도 하며 머릿속에 다시 저장했겠구나 싶었다.

아무런 규칙 없이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다가 비로소 인간이 만든 규칙과 방향 속에서 배운 내용을 나열하고 정리하며 책상에 앉아 있겠구나 싶었다. 엄마처럼 글을 읽고 쓰고 싶어 했던 아이가 그걸 하기 위한 첫 단추를 꿰매는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싶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숙제하는 시간이 하루 24시간 중 가장 감동적인 시간이 되어 가고 있다. 아이가 세상을 언어로 배우는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설렘, 이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 커다란 나무의 촘촘한 나이테처럼 아이도 성장할 것 같은 기대감, 곰곰이 생각하느라 치켜뜨는 아이의 눈망울을 들여다볼 때의 즐거움,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옹송그리는 시간이다. 

며칠 지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배움은 어때야 할까. 지금까지 나에게 배움은 어떤 것이었고, 아이에게 배움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정리가 필요했다.

나에게 배움이란 끝이 없는 해변을 하염없이 걷는 행위였다. 세상을 활활 태워 삼키듯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도 만나고 앙증맞게 물 위로 떠 올랐다가 이내 거대하게 다가오는 해도 만나는 길,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속이 텅 빈 조개껍데기도 만나고 바다의 기운 가득 채워 살아 움직이는 조개도 만나는 길, 다가오는 파도가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만나고 멀어지는 파도에 몸을 실어 큰 꿈 안고 바다로 나가는 아이도 만나는 길이었다.

지치지 않고 걷기만 하면 수도 없는 즐거움을 만나는 여정이 바로 배움이었다. 배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치지 않는 마음, 지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용기, 새로운 발견 앞에 기뻐하고 앎에 즐거워하는 자세였다. 

다음 날, 숙제를 봐주다 뜬금없이 아이에게 질문했다. 

“지금 하는 공부 재밌어?”

아이는 생각할 틈도 없이 대답했다.

“응, 재밌어. 그리고 신기해.”

‘그래, 그럼 됐지, 그걸로 충분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뭔가 배우면서 재미를 느끼는 방법은 정말 무궁무진해. 모르는 걸 알아가는 재미도 있고, 같은 내용인데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느껴지는 재미도 있어. 그리고 어려운 내용이 갑자기 이해가 되고 쉬워지는 재미도 있고,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일이 점점 자신 있는 일이 되는 재미도 있어. 앞으로 계속 배우고 공부하다 보면 온갖 종류의 재미를 느끼게 될 거야. 엄마도 너랑 같이 늘 공부하고 배우면서 재미를 느낄게.” 

여러 종류의 즐거움을 나열하면서 한 가지 말 못 한 게 있었다.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는 것. 마흔이 된 나도 인제야 어렴풋이 꾸준함의 힘을 느끼는데 이제 막 학교생활을 시작한 아이에게 말로 전하는 게 나의 욕심이 아닐까 싶어 전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사는 모습으로 꾸준함이 무엇인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느끼니까.

아이의 숙제를 봐주면서 나의 생활을 돌아본다. 그보다 크고 작은 일들 ‘꾸준하게’ 잘 해오고 있는지 살펴본다. 일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 속에서 꾸준히 운동하고, 책을 읽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을 마주하고 웃고 마음을 포개며 살아가고 있는지 떠올려본다.

그보다 이 모든 것들을 꾸준하게 해내고 있는지 돌아본다.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마음, 포기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힘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나의 숙제가 시작된 셈이다.

초등 과정을 시작하던 날은 아이의 여섯 번째 생일이었고, 학부모가 되는 나에게도 의미가 있는 날이어서 내 마음을 글에 담았다.

어디로 향하는지 아직은 모르는 아주 긴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 들었고, 우리는 이렇게 조금 더 자랐다.

◇ 산다는 게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때마다 기억해, 엄마가 있다는 걸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 세상이 다 싫어지려고 할 때, 엄마한테 와. 네 등 쓰다듬어주고 재워줄게. ⓒpexels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 세상이 다 싫어지려고 할 때, 엄마한테 와. 네 등 쓰다듬어주고 재워줄게. ⓒpexels

어린이의 생일과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하며.

나는 너를 이제 코딱지라 부르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너를 어린이라 부를 거야.

내 마음속에서 넌 언제나 어리고 여린 아가이지만 네 인생에서 지금의 너는 가장 크고 성숙한 순간이니까 나도 네 시간을 기준으로 너를 대할 거야. 그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

어쩌다 보니 우리는 지금 싱가포르에 살고 있어. 어떤 이들은 영어를 배워서, ‘헬조선’을 떠나 살아서 네가 큰 혜택을 얻었다고 생각해. 글쎄, 너는 어떤 생각을 할까, 또 앞으로 더 자라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벌써 너에게 한국어는 점점 어려워지고, 한국인 친구도 거의 없어. 그래도 넌 한국인이라 할 수 있을까. 영어를 잘하면 국적, 언어, 인종을 극복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진정한 지구인이라 느끼며 살 수 있을까.

답을 내리려니 참 어려워. 그래서 언젠가부터 생각했지. 한 번 가보자. 모르는 게 많으니까 모르는 게 많은 게 당연한 거니까 겪어봐야 아니까 가보는 거라고 다짐했어. 

어느새 네가 초등학생이 됐어. 어른들은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단정 짓기도 하지만 너는 세상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알아가고 있어. 어른이 만든 세상에서 어른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 사이사이에서, 너의 눈이 머무는 풍경에서 네 마음이 듣고 싶어 하는 것들을 찾아서 네 세상을 그리고 있었어.

타고난 피가 한국인이어서, 타고난 몸이 여자여서, 자라는 동네가 아시아여서, 쓰는 언어가 영어여서 이렇게 살아야 하고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건 세상에 없어. 

네가 갖고 싶은 모습대로 살아. 너 자신으로 자유롭게 살아. 네 마음에 솔직할 수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 그게 너와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인 것 같아. 그럼 또 어른들이 말할 거야.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니까 함부로 자유를 말하면 안 된다고. 

이건 구구단 외우듯 하는 게 아니야. 하루 배웠다고 다음날부터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천천히 배워서 습관처럼 몸에 오랫동안 기억되도록 애써야 하는 거야.

천천히 호흡을 따라 움직이는 몸을 느끼듯이, 출렁이고 동요하는 감정에서 진짜 감정을 찾아 헤매듯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찾아보고 결국 찾아내는 거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어떻게 하냐고? 다시 찾으러 가는 거야. 아무렴 어때, 제대로 찾아보고 싶은 네 마음이 더 강렬하다면 계속 찾아야지. 

초등학생이 되는 너를 보면서 나를 다시 봐. 내가 변하지 않고 머무르기만 하면 너의 몸동작들과 방향과 속도를 이해하기 힘겨워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 같아. 그런 연유로 나도 부단히 움직여보려 해.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변하는 세상을 내 손끝으로 내 마음으로 느껴 보려 해. 나도 계속 틀려보고 정답을 찾아보려 해. 너랑 계속 교감하면서 잘 늙어가려 애쓰려 해. 

‘꼰대’같은 소리 딱 하나만 하자면, 진짜 살아가는 게 녹록지 않아. 그럴 때 내가 딱 하나 너에게 해주고 싶은 게 있어.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 세상이 다 싫어지려고 할 때, 엄마인 내가 네 등 쓰다듬어주고 재워줄게. 그걸 제일 잘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 

지구 끝에서 끌어온 에너지 담아 너를 응원해. 

성장, 실패, 도전이 포도알처럼 영글어갈 너의 인생 전체를 응원해. 

네 모습 그대로 살아갈 너를 진심으로 응원해. 

엄마가 가끔 잠든 네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그런 세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 그만큼 나는 너를 사랑해. 생일 축하해, 너의 초등학교 시작도 축하해. 

엄마가, 2020년 9월 1일.

*칼럼니스트 김보민은 '한국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라는 호기심으로 2년째 싱가포르에 체류 중이다. 싱가포르에 올 때 4살이던 첫째와 생후 2개월이던 둘째는 어느덧 각각 6살, 26개월로 훌쩍 자랐다. 365일 여름이고,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로 영어를 쓰고, 작은 나라이면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아시아를 가르쳐주고 있는 싱가포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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