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글쓰기] 5. 일기를 에세이로 만드는 방법

[직장인의 글쓰기] 5. 일기를 에세이로 만드는 방법

ㅍㅍㅅㅅ 2020-09-25 15:48:54 신고

일기는 최초의 글쓰기

말 그대로, 일기는 개인 최초의 글쓰기다. 사람은 기록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본성이 있으므로 글자를 익히면 뭐라도 적는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일기를 숙제로 내준다. 덕분에 타의적으로도 시작하게 된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 중에도 지금까지 그 일기를 이어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글’은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받아 내고, 그 받아 내는 과정에서 치유를 선사한다. 말과 표정은 감정을 표현할 뿐, 그것들을 붙잡아놓지 못한다. 붙잡히지 않은 감정은 허공에서 소멸한다. 사람들은 소멸하는 것에서 존재의 위협을 느낀다. 어느 한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져 버릴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어쩌면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일기를 쓰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내 감정을 온전히 쏟아 내고 그 과정에서 치유를 얻는 것. 그래서 나는 일기를 ‘해우소(解憂所)’와 같다고 생각한다. ‘해우소’는 사찰에 딸린 화장실을 이르는 말로, 직역하면 ‘근심을 푸는 곳’이 된다.

 

일기는 ‘죽기 전에 태우고 가야 하는 것’

바로 전 저서에서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랬더니 한 독자분께서 재치 있는 서평을 남겼다. ‘일기는 죽기 전에 태우고 가야 하는 것’이라는 서평이었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이 얼마나 명료하고 선명하고 군더더기 없는 표현일까!

이 정의에는 앞서 말한, ‘일기는 감정을 풀어내는 곳’이라는 뜻 외에도 더 중요한 절대적 특성이 함축되어 있다. ‘혼자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글쓰기 강의를 오시는 수강생 분들 중 많은 분들이 글쓰기를 시작하고 싶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는 일기 말고, 제 글을 남에게도 보이고 싶어서요.

사람의 본성이란 글보다 더 묘하다. 혼자 보는 글로는 만족을 못한다. 기록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본성 뒤에 더 큰 인정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알아채야 하고, 또 인정해야 한다. 죽기 전에 태우고 가야 하는 글보다는, 누군가에게 내어 보이고 싶은 글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앙망하는 것이다.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

그렇다면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는 뭘까? 다음 강의 자료를 함께 보자.

스테르담 ‘나를 관통하는 글쓰기’ 강의록

결론부터 말하면, 메시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따라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에세이나 일기나 내 이야기, 내 주변 이야기를 쓴다는 점에선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생산물’이 되느냐 ‘배출물’이 되느냐는 온전히 메시지의 유무로 갈린다.

일기엔 공감과 위로, 깨달음 등이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에세이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이 메시지로 공감과 위로, 그리고 깨달음을 선사한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에세이를 읽는 독자라고 생각해보자. 온갖 불만과 불평을 쏟아 놓은 글을 시간과 돈을 들여 읽고 싶을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배출이 나의 마음을 움직일까?

내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메시지를 전하며 ‘우리 이야기’가 되는, 끝내는 배출물이 아닌 ‘생산물’이 되는 것이 에세이다. 그래서 에세이를 잘 쓰고 싶다면 에세이를 읽는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 편하게 공감하며 위로받고, 통찰과 깨달음을 얻는 게 바로 에세이를 읽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사실, 독자로서는 이러한 것을 바라면서 막상 쓸 때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글을 쓰며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일기를 에세이로 만드는 방법

자, 그렇다면 나의 일기는 어떻게 에세이로 바꿀 수 있을까?

 

1. 사색의 깊이와 통찰의 넓이를 키운다.

내 생각보다 깊이가 얕고, 내 삶의 통찰에 자극을 주지 못하는 글을 읽을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에세이는 필력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진솔함과 통찰이 더 중요하다. 통찰은 메시지를 포함한 삶의 깨달음이다.『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에 수록된 문구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통근의 ‘근’자가 부지런할 근이라는 걸 알고 생각이 달라졌다. (중략) 고로, 통근하는 모든 존재는 부지런하다.

나도, 당신도.

– 스테르담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통근’ 中

통근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다. 나는 직장인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고, 그 숙명을 깊이 사색했다. 그러자 ‘반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단어 안에서 ‘통근(출퇴근)’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침에 통근버스를 타면서 버릇처럼 하고 있는 ‘통근’의 뜻을 그제야 찾아봤는데 ‘근’ 자가 ‘부지런할 근’이란 걸 알고는 놀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직장인이라고 힘들어만 하거나 스스로를 불행하다 생각했던 내게, ‘부지런할 근’은 최고의 통찰이자 메시지였다. 더불어, ‘나도, 당신도’란 말로 나는 독자 분들께 위로와 공감을 건네고자 했다.

만약 일기로 머문 글이었다면 ‘나는 통근이 힘들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힘을 내자.’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또는 ‘나는 통근의 근 자가, 부지런할 근이란 걸 알았다. 신기했다’가 되거나.

더 깊어야 한다. 더 넓어야 한다. 내 사색과 통찰이 깊고 넓을수록, 평범한 일상도 다르게 보고 특별히 표현하려 노력할수록 우리는 일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세이에 가까워질 수 있다.

 

2. ‘자기반성’과 ‘역지사지’를 한다.

사실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은 이것이다. 먼저 이 글을 보자.

오늘 상사가 나에게 뭐라고 했다. 기분 나쁘다. 항상 나에게만 뭐라고 한다. 저 사람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직장생활 정말 더럽고 힘들다.

내가 이러려고 힘들게 공부한 게 아닌데. 당장 때려치우고 내 일 하고 싶다!

많은 직장인들은 노트나 PC나 마음속에, 이와 같은 일기를 한 번씩은 써봤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일기다운 기록일 것이다. 속은 시원하지만 나만 봐야 하는 글에 머무르고 만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반성과 역지사지를 넣어 바꿔보면 어떨까?

오늘 상사가 나에게 뭐라고 했다. 역시나 기분이 좋지 않다. 저 사람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뚫고 입으로 나올 뻔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감정에 휘둘리기보단, 메시지에 집중하기로 한다. 기분은 나중에 나빠도 된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보고서를 급히 만드느라 오타가 있던 것 같다. (자기반성) 상사도 그의 상사에게 보고를 하다 혼난 것 같은데, 나라도 나에게 화를 낼만하다는 생각이다. (역지사지)

그의 말하는 방식은 기분 나쁘지만, 상황을 볼 때 내가 개선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 내가 상사가 된다면, 감정과 메시지는 구분해서 말하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기분은 좋지 않아도, 뭐라도 하나 배운 의미 있는 날이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상사의 잔소리를 ‘감정’과 ‘메시지’를 구분하여 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지켜낼 수 있으니까. (메시지)

자기반성과 역지사지는 깨달음을 준다. 그 깨달음은 메시지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일기 같은 부분도 있지만, 분명 좀 더 나아졌다. 그래서 나만 읽고 끝낼 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글을 어딘가에 게시한다면, ‘맞아요’ 또는 ‘와, 정말 그러네요. 저도 그래 봐야겠어요’란 댓글이 달릴 가능성이 높다. 결국 자기반성과 역지사지는 스스로를 메타인지함으로써 깨달음을 극대화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도구라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적용해보길 권한다.

 

3. 어느 것에든 ‘감정이입’을 해본다.

에세이의 가장 큰 덕목은 ‘위로와 공감’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감정을 이해할 때 시작된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려보지 않은 사람이 위로와 공감을 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억지로 쓸 수야 있겠지만,  그 글에는 진솔함과 온기가 없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심지어는 사물이나 상황에도 감정을 이입해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감정을 이입한다는 건 상대방을 ‘숨 쉬는 존재’로 인식하고 대우한다는 것이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널리 알려진 이 시는, 어떻게 상대에게 이입을 해야 하는지 잘 말해준다. 나도 여러 사물들에 감정 이입을 한다. 예를 들어 물티슈에 이입해 보자.

온갖 더러운 것을 닦아 주는 존재. 군말 없이 모든 것을 안고 가는 존재. 포용하고 수용하고, 결국 자신은 더러워지고 다른 이에게는 깨끗함을 선사하는 존재.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사물에게서도, 감정을 이입하면 희생이라는 메시지가 튀어나온다.

‘시간’에 (불만의)감정을 이입한 글 하나도 함께 보자.

시간

되돌려지지 않는 것은 모두 다 이 놈 때문이다.

나는 그놈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탄생과 동시에 놈은 내 숫자를 저가 센다.

째깍째깍 쫓기며 살다 나는 회의한다.
놈은 왜 내 숫자를 세고, 나는 왜 그 셈에 따라 죽어가는가.
그놈에게 대항할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일방통행으로 내달리도록 놈은 나를 조종한다.
나를 의식할 찰나도 없이 밀어내는 통에 나는 자주 실수한다.
고로, 흑역사는 나의 잘못이 아니다.

야멸차게 밀어붙이는 놈의 무식함과
되돌릴 수 없는 일직선의 무례함이 원인인 것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시계를 부순다고 그놈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그놈에 대항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다.

순간의 순간을 쪼개어 나를 의식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는 모든 순간은 놈의 함정이다.

상대성과 절대성을 오가는 놈은, 그렇게 약삭빠르다.

매일을, 매 순간을.
온몸과 마음으로 놈에게 대항해야 하는 이유다.

– 스테르담 <시간>

에세이, 우리말로 산문은 ‘운율이나 음절의 수 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을 말한다. 그래서 에세이를 쓴다는 건 무언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써도 된다는 뜻이 된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과연 내 글이 누군가에게 읽힐까? 이렇게 쓰면 비웃지 않을까? ‘일기는 일기장에’란 악플을 받으면 어쩌나? 이런 생각들이 바로 글쓰기를 멈추게 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에세이는 필력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조금만 더 깊이, 넓게 생각하고 자기반성과 역지사지를 거쳐 주변의 것들에 공감하다 보면, 누군가 시간과 돈을 들여 읽을 글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챙겨야 할 내 삶의 선물이다. 우리가 글쓰기를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기에서 벗어나 에세이를 써야 하는 이유다.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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