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예능 프로그램의 불편한 현실_라파엘의 한국살이 #34

외국인 예능 프로그램의 불편한 현실_라파엘의 한국살이 #34

엘르 2020-09-25 23:00:00 신고


jakob-owens ⓒUnsplash


최근 몇 년간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외국인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 별생각 없이 보다 보면 재미있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외국인이 젓가락도 잘 쓰고 매운 음식도 곧잘 먹는다.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거나 한국인보다 한국 문화를 더 잘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예능 프로그램의 외국인 엔터테이너들이다.

나도 처음엔 이런 프로그램들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프로그램들이 가진 공통점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1)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급을 매긴다

솔직해지자.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외국인들은 여러 계층이 있다. 바람직한 외국인 그룹과 덜 바람직한 외국인 그룹이 극명하게 나뉜다. 한국에서 TV에 나오는 외국인은 대체로 ‘선진국’ 출신의 백인을 의미한다. 백인이 아닌 ‘외노자’나 ‘결혼 이주 여성’도 엄연하게 같은 외국인이지만 한국 미디어 환경에서는 다르게 비춘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런 외국인 출연 프로에서 중국계 영국인이나 미국인을 본 적 있는지. 고향 친구를 초청해서 한국을 여행하는 방글라데시 외국인 노동자를 본 적 있는지.

나는 종종 출연 요청을 받는다. 바쁜 스케줄을 핑계로 거절하면 꼭 다시 묻는다. “혹시 추천할 만한 외국인 친구가 있어요?” 한번은 대학원 반 친구 중에 한국에 사는 베트남 여성을 추천한 적이 있다.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해서 보내줬더니 “혹시 다른 외국인은…”

결혼한 베트남 여성이 TV에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주로 휴먼 다큐멘터리에서 다뤄진다. 한 축의 ‘외국인’은 새롭고 밝고 긍정적이고 재미있고, 지적으로 그려지는 데 반해 다른 축의 ‘외국인’은 한국 사회 적응, 갈등, 고난의 과정을 보여주며 어둡고 우울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2) 100% 사실이 아니다. 그저 대본일 뿐이다

외국인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출연자들은 어김없이 정해진 대본을 따라야만 한다. 그들은 대부분 주어진 역할과 대본에 따라 행동하고 이야기한다. 물론 한국인들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유사할 것이다.

문제는 많은 시청자가 외국인을 알아갈 기회가 이런 종류의 외국인 출연 프로그램으로 한정되어 있을 때 발생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외국인의 현실과는 무관하다. 한국인 PD가 상상하는 외국인에 대한 입장과 관점을 드러낼 뿐이다. 한국 문화를 경험하는 외국인이라면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낭만적인 판타지가 대본에 드러나고, 출연자들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다. 대중이 가지는 외국인에 대한 인식이 왜곡될 여지가 크고, 잘못된 고정관념이 생길 수 있다.

한번은 외국인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 요청을 받아 사전 미팅에 참석한 적이 있다. 기자로서 요즘 어떤 주제에 관심 있는지 물어봐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차별금지법과 자살 문제에 관해 관심 갖고 있다고. (현재 나의 관심이 K-음식이나 K-팝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 해당 프로그램의 콘셉트에 나는 맞지 않았다. 물론 그 후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levi-stute ⓒUnsplash


3) 국뽕

대본이 정해져 있고 방송국이 특정 아젠다를 고수하다 보니 출연자들이 한국 사회나 한국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나 반응을 드러내는 것은 어렵다. 어쩌다 익숙하지 않은 특정 음식이나 습관에 대해 불편함을 내비치기라도 하면 시청자들의 항의가 출연자의 SNS를 뒤덮는 경우도 있다. 방송국은 시청률에 민감하다 보니 시청자들의 반응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사실이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그저 재롱을 피우는 동물원의 동물처럼 행동해야 한다. 한국 사회와 문화가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지에 대한 칭찬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것만 바람직하다.

4) 열등의식

외부의 인정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인정은 자신이 평소에 동경하고 우러러보는 사람으로부터 받았을 때 그 만족도가 높아진다. 예능에 등장하는 ‘선진국’ 출신 외국인이 그렇다. 다른 나라의 문화와 마찬가지로 내가 경험해서 아는 한국 사회와 문화는 ‘선진국’ 출신 사람들의 인정과는 별개로, 한국의 경제적 위상과는 별개로, 그 자체만으로 고유한 가치를 가졌다. 왜냐하면 수백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발견, 탐구, 인내, 고통과 같은 무한한 노력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출연 예능프로그램은 과연 재미있는 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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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살이 9년 차, 영국에서 온 남자 라파엘 라시드가 쓰는 한국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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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라파엘 라시드 번역 허원민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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