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딸이 기억하는 박완서 작가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책 속 명문장] 딸이 기억하는 박완서 작가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독서신문 2021-01-21 16:47:29 신고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어머니는 이 집을 나에게 물려주셨다. 그냥 살아라 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고 그동안 나는 이 집에서 그냥 살았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집의 부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재도 아니고, 마당도 아니고, 부엌이었다. <15쪽>

미나리를 다듬으며 거머리를 대담하게 떼어버리던 어머니의 야무졌던 손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다듬고 난 미나리 뿌리를 버리지 않고 예쁜 항아리에 물을 받아 담가두셨지. 그게 다시 잎이 올라와 겨울의 방 안을 연두색으로 생기 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끊어서 먹기도 했다. 알뜰했던 어머니, 아니 그 시절 엄마들은 다 그러셨지. 뿌리의 생명력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웠던 마음이 읽힌다. <37쪽>

그 애가 세상을 떠나고 세모(歲暮)가 왔다. 어찌 그 몇 달을 지낼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가 쓰신 일기를 잘 보지 않는다. 너무 슬프기 때문에.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이 너무 서글프기 때문이다. 미쳐버리지 못하는 정신의 명료함을 탓하던 그 시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만두를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다던 아이. “만두 박사가 없는데 무슨 재미로 만두를 하나?” 하시면서도 그해 연말 우리가 마련한 재료로 만두를 빚으셨던 엄마. 그래서 만두를 보면 슬픔이 올라온다. 음식은 말이 없는데, 만두를 빚으면 만두 박사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44쪽>

이튿날 어머니 집에 들러 혼자서 민어 한 마리 잡은 것을 무용담 말하듯이 흥분해 늘어놓았다. 큰 칭찬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것 같았다. 민어회와 양념한 민어구이를 해드렸을 때 그 바라보던 눈길을 잊지 못한다. 약간은 뜨악하게.

할머니가 생선을 잡으시던 그 장면이 나에게 재현된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음이 아닐까? 그 장면을 쓰셨으면서도 미각에 집착했던 할머니의 유난스러움이 나에게 물려지기를 바라지는 않으신 게 아닐까? <77쪽>

7시 무렵부터 엄마는 부엌에서 아버지의 저녁 술상을 차렸다. 그때 엄마가 특별히 만들었던 요리를 잊을 수 없다. 그걸 여러 번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새우살을 다져 쫀득해진 것을 식빵 사이에 넣어 튀긴 요리는 참으로 황제의 음식처럼 보였다. 그 당시 어느 집에서도 그런 음식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만족감과 행복감은 거의 완벽해 보였다. 그걸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거기에는 그 어떤 눈길도 새어들지 않은 우리 가족만의 낙원이 있었다. <92쪽>

냉장고와 싱크대와 도마와 식탁을 오고 가며 하루 세끼를 해결하고 설거지를 마치는 순간, 하루의 의무를 끝낸 듯 마음이 숙연해진다. 어쩌면 그 마침의 순간을 위해서 하루를 지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행주를 빨아 삶는다. 마치 하나의 마침표처럼. 지루함과 곤고함의 상징과도 같은 행주. <102쪽>

남긴 음식에 관한 문제는 음식점의 갈비구이가 아니라도 매일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어떤 때는 과감하게 버리기도 하지만 식구가 집에 없을 땐 혼자서 남긴 음식을 꺼내 먹는 것이 버릇이다. 그게 그리 구차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잘 데우고 약간의 조리를 가하여 번듯한 식사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마음이 개운하다고 해야 하나. 음식을 버릴 때보다 남긴 음식을 거두어 먹을 때 떳떳하고 알뜰함에 스스로의 만족감이 분명히 있다. <147쪽>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호원숙 지음 | 세미콜론 펴냄│180쪽│11,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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