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가 만든 세계

브랜드가 만든 세계

싱글즈 2021-04-13 16:00:00 신고

브랜드가 만든 세계

브랜드 공식 SNS에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무색무취 천편일률적인 게시물에 무관심하던 소비자들이 이제는 스스로 찾아와 덕질을 하기 시작했다.

브랜드 공식 SNS에 가면 증후군에 걸린 담당자가 모니터 뒤에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천편일률적인 말투로 열심히 무언가를 홍보하고 있지만 도무지 캐릭터가 상상되지 않는 로봇처럼 느껴져 흥미도 호기심도 생기지 않는다.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고 싶은 마음은커녕 팔로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들지 않는다. 최소한 스타벅스 기프티콘이라도 내걸어야 반응이 좀 있는 게 현실. 수많은 SNS 담당자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빙그레 인스타그램 @binggraekorea


빙그레 왕국의 기원
SNS 담당자 혼자 허공에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던 브랜드 SNS 계정들이 하나둘 자아를 갖기 시작했다. 시발점이 된 건 2020년 2월 24일, 빙그레 공식 SNS(@binggraekorea)에 혜성같이 나타난 빙그레우스다. 풀네임은 빙그레우스 더 마시스. 치명적인 셀카와 함께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 ‘안녕?’이라는 문구만 적혀 있어 처음에는 팔로를 취소하는 이들도 많았다고. 다행히 팔로어가 떨어져나가는 속도보다 바이럴되며 퍼져나가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 이내 빙그레우스를 향한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빙그레우스는 빙그레 왕국의 후계자로 아재 개그를 즐기는 인물. 어버이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요플레 뚜껑, 뽕따 꽁지, 슈퍼콘 끝부분을 모아 선물했다가 아버지를 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2020년 11월 10일, 드디어 빙그레 나라의 왕이 되면서 이름이 빙그레우스 더 마시스짐이 되었다. 투게더, 메로나, 비비빅 등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빙그레의 주역들도 세계관에 편입시켰다. 투게더는 빙그레 나라를 가장 오랫동안 보필해온 비서 ‘투게더리고리경’으로 의인화했다. 메로나는 빙그레 왕국의 공작 ‘옹떼 메로나 부르쟝’으로 재탄생했다.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올 때 메로나’라는 드립을 프랑스어처럼 승화시켰는데 멜론 컬러의 의상과 헤어 컬러가 시그너처다. 엑설런트는 파란 포장지의 바닐라, 황금색 포장지의 프렌치 바닐라를 쌍둥이로 의인화했다. 빙그레 나라의 빙전당을 관리하는 신이라는 설정이다. 끌레도르, 더위사냥, 비비빅, 바나나맛 우유, 요플레, 요맘때 등 수많은 제품들도 백작, 기사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빙그레 나라를 함께 이끌어가고 있다. ‘인스타 담당자님, 얼마 안 있으면 퇴사하시나요?’라는 댓글이 달리고 해킹을 의심하던 소비자들은 빙그레우스와 댓글 놀이를 하며 빙그레 왕국의 신하를 자처한다. 쓸데없이 고퀄리티로 짜여진 촘촘한 세계관에 ‘빙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신세계면세점 인스타그램 @shinsegaedutyfree


빙그레우스의 아성을 위협하는 뉴페이스
“소인, 신세계면세점 홍보 담당자 심삿갖이라 하옵니다. 신세계면세점 인수타구람(사람 人, 손 手, 때릴 打, 기쁠 , 넘칠 濫)을 ‘사람들이 손뼉을 탁 하고 칠 만큼 기쁨이 넘쳐나는 곳’으로 만들어보겠사옵니다.” 신세계면세점(@shinsegaedutyfree)도 새로운 SNS 담당자를 채용(?)했다. 이름은 심삿갖. 신세계면세점의 초성 ‘ㅅㅅㄱㅁㅅㅈ’을 조합한 이름이다. 외국에서 진귀한 보물을 들여오는 명례방 거상 심家가 타임슬립해 인수타구람 담당자가 됐다는 설정. 봇짐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아이템을 공개하는 #왓츠인마이봇짐 콘텐츠를 통해 지갑, 영양제, 선글라스를 소개하고 자기 전 나이트루틴을 공유하며 진동 클렌저와 보디브러시 PPL을 한다. ‘태양을 피하기엔 삿갓만으론 부족하옵니다’ ‘동의보감에 어찌 이 물건이 없을꼬…’ ‘소인 관리하는 남자이옵니다’ 같은 심삿갖의 멘트는 폭소를 자아낸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그랜절을 올리는 인증샷(?)을 업로드하며 ‘빠르게 진화하는 예도를 따라잡기 벅차옵니다’라고 말하는 심삿갖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그랜절을 올린 건 심삿갖뿐만이 아니다. NC 신구로점 인스타그램(@nc.singuro) 담당자 도진아도 올해 설을 맞아 그랜절로 인사를 올렸다. #예의가뭔지아는친구 #절중에절 #예중의예 #올해도잘부탁드립니다 #설당일하루만쉬어갑니다 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도심형 진짜 아울렛’의 앞글자를 딴 도진아는 쇼핑 N년 차, 허세 가득하지만 도전을 좋아하고 진짜 멋을 아는 남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멋남답게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사적인 DM 사절/광고 사절’이라는 문구도 써놓았다. 도진아 효과 덕분일까. 오픈 이후 4개월간 온·오프라인 합해 350만 명의 고객이 다녀갔다.

이미지 출처: NC 신구로점 인스타그램 @nc.singuro


팬덤을 만드는 세컨드 유니버스
아이돌의 콘셉트, 마블 영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유니버스가 브랜드에도 펼쳐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을 넘어 세계관을 설정한다. 세계관이 치밀하고 정교할수록 소비자들은 과몰입하게 된다. 단 매력적인 캐릭터, 이해하기 쉬운 설정이 필수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머러스함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세계관이 있다 해도 재미있지 않으면 외면받는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상품에 대한 재미를 추구하는 MZ세대가 유통가의 큰손으로 떠오르면서 이들 펀슈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마케팅이 치열하다. 당장 물건을 사라고 부추기기보다 브랜드 세계관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만든다. 일단 ‘재미있다’고 인식된 브랜드는 이후 소비할 때 한 번이라도 더 눈여겨보기 때문이다. 웃기고 재미있으면 시키지 않아도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주위에 알리고 싶어 하는 것도 펀슈머들의 특징이다. 소비자들은 자신을 짐으로 칭하는 빙그레 왕국 후계자에게 ‘폐하’ ‘전하’라고 지칭하며 알아서 머리를 조아린다. “즈언하아아 이제 왕국의 자연까지 우려하시는 겁니까. 과연 빙그레우스 전하십니다.” 빙그레우스가 자주 쓰는 어미는 ‘-하시오’나 ‘-했소’ 같은 것들. 이에 소비자들은 ‘-하옵니다’로 응답한다. 소비자를 뫼시기에 바빴던 그간의 공식 SNS와는 반대로 소비자를 하대(?)하기 시작했다. 거상 심삿갖은 자신을 ‘소인’으로 지칭하며 낮추고 영어식 표현은 한자로 바꾼다. “소인은 자기 전 항상 하는 야밤일과가 있사옵니다”, “좋아요와 팔로는 국룰이옵니다”. B급과 병맛이 조화된 신선함이다. 가상 캐릭터에 특정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소비자들이 부담 없이 댓글 놀이를 하기에 좋은 판을 깔아준다. 인터랙션이 중요한 공식 SNS의 체통을 지키면서도 자연스럽게 소비자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 놀이판이 재미있어 보이면 그냥 지나가던 사람들도 잠시 멈춰 놀이에 끼어들게 된다. 도진아는 아울렛을 의인화한 인물이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설정이 없지만 해시태그를 유머러스하게 사용해 소비자들이 댓글에서 이를 패러디하게 만든다. 가상의 인물로 빙의한 SNS 담당자는 이에 재빠르게 호응하며 세계관을 공고히 한다.
세계관 마케팅의 유통기한
소통을 하지 않는 브랜드는 도태되는 시대다. 피드백을 요구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소비자의 요구에 묵묵부답인 시대착오적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세계관이 구축되면 괜한 딴지를 거는 블랙 컨슈머가 줄어들고 딱딱해지기 쉬운 SNS의 분위기도 한결 부드럽고 즐거워진다. 자극적인 재미를 좇다 스스로 패망을 자초할 일만 벌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세계관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브랜드 담당자들은 가상 캐릭터에 빙의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소통을 하고 있는 중이다. 변수는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관심이다. 점점 치열해지는 세계관 마케팅의 경쟁 속에 더 재미있고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이전의 세계는 빠르게 쇠퇴할까? 9만여 명이던 빙그레 공식 인스타그램의 팔로어는 빙그레우스의 등장 후 6개월만에 14만 명이 됐고 지난해 3분기 누적 매출액은 전년 대비 6.7% 증가해 마케팅도 매출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고 있지만 과연 올해도 세계관 마케팅의 힘이 미칠지는 의문이다. 애써 구축해놓은 세계관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될지, 단기적인 이벤트로 활용한다면 브랜드 이미지에는 득이 될지 아직은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소비자들이 브랜드가 잘 구축해놓은 가상의 세계에 보따리를 풀어놓고 노는 걸 매우 즐긴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사람들이 모이고 이들이 즐거워하면 브랜드는 이에 힘입어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오프라인 이벤트든 신제품이든 이벤트성 굿즈든 말이다. “우리 OO 하고 싶은 것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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