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부총리가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가장 중요한 배경은 현재 부총리 4명 가운데 후 부총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이 은퇴 대상이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 최고위 간부는 당 대회가 열리는 해를 기준으로 67세까지는 계속 기용될 수 있고, 68세부터는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칠상팔하’(七上八下)라는 암묵적인 관례가 있는데 이를 적용하면 후 부총리는 유력한 후보다. 후 총리는 50대 젊은 정치국 위원이기도 하다.
후 부총리는 18기와 19기에 정치국 위원을 역임했으나 최고 지도층인 상무위원 7명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번 당대회에서 상무위원에 진입하는 동시에 부총리에 내정될 것이란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후 부총리는 대표적인 ‘개천에서 난 용’이다. 그는 1963년 4월 후베이성 우펑(五峰)현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의 7형제 자매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마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최고 명문 베이징대 중문학과(1979년)에 입학한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있다.
홍콩 밍바오(명보)에 따르면 후 부총리의 원래 성은 왕씨였지만 나중에 모친의 성을 따라 후씨로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 후 부총리가 고향을 찾는 일은 드물지만 지난 2019년 5월에 운동화 차림으로 동네 주민들과 촬영한 사진이 온라인상에 올라온 적이 있다고 한다.
후 부총리가 공산당에 입당한건 대학 졸업 연도인 1983년이다. 이후 공산당의 3대 파벌로 불리는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 티베트(시짱) 자치구에서 간부로 일하기 시작해 시짱에서 20여년 동안 경력을 쌓아왔다. 2006년엔 시짱 자치구 당위상무 부서기까지 올랐다. 2006~2008년에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가 됐고 2008~2009년에는 허베이성 성장, 부서기, 2009~2012년에는 네이멍구(내몽고) 에서 당서기 등을 역임했다. 중국에선 성(省) 당서기가 성장보다 서열이 높다.
후 부총리는 이처럼 변방으로 꼽히히는 시짱(티베트)와 네이멍구(내몽고) 등에서 주로 근무한 것이 특징이다. 2012년에는 중앙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광둥성의 당서기가 됐다. 시진핑 집권 2기가 시작된 2018년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다.
후 부총리는 다만 리 총리와 같은 공청단 파로 분류되며 태자당(太子黨·당정 최고 원로 자제들 파벌) 파인 시진핑 사람이 아니라 점에서 총리 기용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도 나온다. 부총리 경험이 있는 왕양, 한정 등도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후 부총리는 총리가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제 1 부총리로서 현재 한정 부총리 자리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후 부총리는 올해 8월 31일 서비스무역박람회 개막식에서는 시진핑 축사를 대독하며 존재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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