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명대사㊳]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영생과 인생

[홍종선의 명대사㊳]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영생과 인생

데일리안 2023-03-20 06:13: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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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히지 않은 피노키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이 되레 더 잘 보인다 ⓒ이하 넷플릭스 제공 인간의 옷을 입히지 않은 피노키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이 되레 더 잘 보인다 ⓒ이하 넷플릭스 제공

많은 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다시 쓰는 건 새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창작만이 아니라 공개 후 받을 평가까지 고려한다면, 칭찬받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익숙한 이야기, 유명한 고전에 대해 ‘나도 알만큼은 안다’라는 생각이 형성돼 있고, 평가의 잣대가 이미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1883년 세상에 나온 카를로 클로디의 소설 ‘피노키오’를 읽지 않았다고 해도, 어린 시절 명작선집에 들어있는 동화를 통해서도 읽었다. 1940년 미국에서 처음 개봉한 이후 전 세계에서 개봉에 재개봉을 거치기도 하고 TV를 통해 다시 방영되면서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문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를 통해서는 영상으로 만났다.

그래서, 제아무리 판타지영화의 대가 기예르모 델토로라고 해도 이토록 새로우리라는 것은 기대하지 못했다. ‘판의 미로’ 등을 통해 워낙 어둡고 직설적으로 판타지를 보여준 감독이다 보니 잔혹동화로 변주됐으려나 얕은 예상을 하거나, 실사영화로도 독특한 영상미를 과시해온 감독인 만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면 영상은 얼마나 대단할까 싶은 상상을 한 정도였다.

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는 법, 나의 상상 폭이 좁은 것이면서 감히 감독 기예르모 델토로를 내다봤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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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형식적 측면에서 컴퓨터그래픽, CG가 판치는 세상에서 공들여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다니 ‘감사’했다. 아카데미가 최고의 영예는 아니라 해도, 아이보다 더 신이 나서 봤던 ‘월레스와 그로밋: 거대 토끼의 저주’ 이후 17년 만에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상을 받는 광경을 보게 했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혀를 내둘렀다. 원작의 기둥 줄거리는 그대로 살리면서도, 원작 소설이 쓰인 시대적 배경에 투영해 전체주의가 인간 세상에 만들어낸 비극(전쟁과 소년병, 가난과 인신매매 등)을 또 하나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총체적으로 아울러 ‘인간을 인간이게, 인생을 인생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해답을 모색했다. 원작을 해치지 않고 창의적으로 풍부하게 키워냄과 동시에 인간과 인생에 관한 철학을 담아내다니!

제일 중요한 건, 그런 형식에 이런 내용인데 ‘재미있다’라는 사실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피노키오에 눈높이를 맞춰 단어의 뜻과 세상이라는 곳과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 모험하고 느끼며 신날 수 있다. 어른은 어른대로 수준 높은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가운데 제페토 할아버지와 피노키오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상실과 사랑에 대해 다시금 깨닫고, 피노키오에게 닥치는 위험들과 힘을 합쳐 극복해내는 용기를 보면서 사회적 자아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아니, 말이 오해를 부르는 듯하다. 재.미.있.다, 그것도 너무. 오랜만에 흡족함이 가슴에 퍼지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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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일일이 다 기억하기 힘들 만큼 명대사들이 나온다. 만족감과 깨달음, 감동의 느낌을 키우는 말들을 모두 기사화하는 건 시간의 낭비다. 직접 보고 들어 느끼시길 원하면서도, 잊지 않고 싶어 적어두는 마음으로 다음의 대사를 소개한다.

피노키오가 죽어서 저승으로 간 장면이다. 카를로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오래전 잃은 어린 아들, 소년의 이름이다. 원작에는 없는 인물로, 소설 작가의 이름 카를로 클로디에서 따 왔다. 아들을 잃고 너무나 슬퍼하는 제페토 할아버지를 위해 푸른 요정이 할아버지가 만든 나무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목소리도 카를로와 같고, 형상도 비슷하다. 피노키오가 저승에서 만난 죽음의 요정은 푸른 요정의 언니다. 푸른 요정은 천사, 죽음의 요정은 ‘죽음의 신’ 하데스를 연상시킨다.

피노키오: 저기요, 계세요?

죽음의 요정: 넌 누구니? 전에도 온 아이(카를로) 같은데.

피노키오: 전 피노키오예요, 남자아이죠. 근데 제가 죽었나 봐요.

죽음의 요정: 그래 알겠다. 빌린 영혼을 지닌 나무 소년. 내 동생(푸른 요정)이 저지른 실수로군, 감상적인 바보 같으니. 그 애가 네게 생명을 줬는데 넌 생명을 가질 존재가 아니야. 의자나 탁자에 생명이 없듯이. 그래서 넌 진정으로 죽을 수도 없는 거야.

피노키오: 신난다, 신나. 그거 좋은 거죠?

죽음의 요정: 다시 말하자면 넌 절대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어. 카를로 같은 인간 아이는 될 수가 없지. 인간의 삶이 귀하고 의미 있는 건 그 삶이 짧기 때문이야. 오해는 하지 마라, 너도 죽을 거야. 그것도 아주 여러 번, 이번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건 진짜 죽음이 아니야, 단지 기다리는 시간이지. 세상엔 규칙이라는 게 있어, 내 동생은 그걸 무시하지만 말이야.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며) 우린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넌 여기 내 곁에서 기다려야 하고. 그 기간은 매번 더 길어질 거다, 시간이 다 될 때까지.

피노키오: 모래가 다 떨어지면요?

죽음의 요정: 널 돌려보낼 거야, 매번.

피노키오: 알겠어요. 그럼, 딱 하나만 물어볼게요. (바닥이 꺼지며 모랫구멍으로 빠지며 비명) 아~~~~~~

딱 하나만 묻기도 전에 피노키오는 다시 살아난다. 죽어도 진짜 죽은 게 아니라 다시 되돌려질 수 있는 삶, 영생이나 진배없는 삶이다. 하지만 죽음의 요정은 ‘진정으로 죽을 수 없으니’ 인간의 아이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매번 되살아나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삶, 진시황이 그토록 원했던 ‘영생’이건만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묘사된다.

“인간의 삶이 귀하고 의미 있는 건 그 삶이 짧기 때문이야”. 두 번은 없을 것이기에, 한 번뿐인 인생을 우리는 알차게 살아내야 한다. 영원하지 않은 삶이라 귀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 줄 아는 우리가 얼마나 많을까. 흔히는 영원할 것처럼 으스대고 끝나지 않을 것처럼 번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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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울림을 전하는 또 다른 장면. 피노키오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영생을 포기하고, 한 번뿐인 삶인 줄 알면서도 제 목숨을 던져 아버지를 구한다. 영생을 포기한 순간 되레 인간의 아이가 되는 역설이다.

자신에게 착한 아이 카를로를 바라는 제페토, 자신을 짐으로 느끼는 아버지에게 부담과 고통이 되기 싫었던 피노키오는 서커스단장 볼페 백작에게 속아 집을 떠나고. 철학하고 글 쓰는 귀뚜라미 세바스티안에게 “왜 피노키오가 당신에게 그러하듯, 있는 그대로의 피노키오를 사랑해 주지 않느냐”는 꾸중을 듣고서야 깊은 후회 속에 피노키오를 찾아 나섰던 제페토는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만나지만 주검이 된 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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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페토: (흐느끼며) 피노키오, 나의 아들. 내가 널 다른 아이로 만들려고 했구나. 이제 카를로가 되지도, 다른 누군가가 되지도 마라. 네 모습 그대로 살아. 난, 난 널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피노키오: (살아나 할아버지의 얼굴을 감싸며) 그럼 전 피노키오로 살래요, 제 아빠로 살아 주세요. 그럼 되겠죠?

제페토: 아주 좋구나.

새 생명을 준 푸른 요정이 사라져가고, 제페토는 뜨거워진 눈시울로 바라본다. 아버지와 영생을 맞바꾼 피노키오가 다시 생명을 얻는 과정, 그리고 진정 아버지와 아들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과 그 뒷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스치는데 자못 감동적이다. 19세기 소설, 20세기 애니메이션과 다른 모습의 피노키오와 그 결말이 주는 여운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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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귀뚜라미에 이완 맥그리거, 요정 자매 1인 2역에 배우 틸다 스윈튼, 이야기의 변곡점을 만드는 원숭이 스파차투라에 케이트 블란쳇 등 유명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로 명작 완성에 힘을 보탰다는 사실을 알고 보는 것도 감상의 재미를 더한다.

피노키오와 카를로를 맡은 그레고리 만은 노래하는 목소리마저 아름답고, 데이빗 브래들리의 연기는 제페토 할아버지 그 자체다.

감독 기예르모 델토로는 지난 2008년부터 ‘피노키오’를 그토록 만들고 싶었던 이유를 영화 자체로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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