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가 정영선의 땅을 위한 예찬

조경가 정영선의 땅을 위한 예찬

바자 2024-04-26 08:00:03 신고

선유도공원 안에 자리 잡은 다양한 식물들은 퍼지고 성장할 것이며 남겨진 구조물은 점점 스러져갈 것입니다. 세월의 아름다움을 더하며 부스러져 가는 선유도를 동반한다는 것은 처음의 설계만큼이나 매 순간 상상력과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선유도공원의 설계는 그렇게 미완으로 남아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선유도공원
도시재생의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선유도공원은 건축가 조성룡과 조경가 정영선의 작품이다. 선유정수장을 자연 정화의 장소로 재탄생시킨 생태공원은 2002년 4월 첫선을 보였다. 1999년 정영선은 공원화 사업의 현상설계를 위해 현장 조사를 갔다. 원래 아름다웠던 선유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황폐한 선유도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웠지만 그곳의 정수시설은 너무 흥미롭게 다가왔다. 곧장 정수장의 입체적인 조형성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에 빠져들었다. “우린 현재의 이 상태에서 최상의 공원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굳이 옛 모습이 아닌 자리에 다시 선유도를 만드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정수장 시설을 활용하되 최소한의 건축물만 살리고자 했다.” 겸재 정선의 〈양화환도〉(1740년)에서 볼 수 있듯이 선유도는 원래 선유봉이라는 절경의 봉우리였다. 채석장과 수돗물 공급을 위한 정수장으로 사용되면서 겸재의 그림 속에서 보던 아름다운 풍광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정수장의 형태를 활용해 유기적인 질서를 가진 공간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는 한국 전통 조경에서 지형과 주위의 경관을 읽어 터를 잡고 순응하는 공간의 틀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옛 선유정수장의 잔재와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선유도공원으로 재탄생했다. 특히 철근콘크리트 잔재물과 식물이 동거하는 시간의 정원에서 ‘조경가는 연결사’라고 칭하는 정영선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 정원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동시에 미래를 꿈꾼다. 궁극적으로 공원 설계의 핵심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시사철 변화할 공간의 경관에 있다. 20여 년 동안 선유도공원을 찾은 이들은 콘크리트의 잔재가 생명력을 얻듯 녹음으로 뒤덮이는 놀라운 과정을 함께 지켜보았다.

우리나라 전통 경관 구성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차경입니다. 담 너머 나지막이 보이는 산과 강물, 과수원을 바라보는 방식에 우리 조상님들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전통 정원에서 자연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거나 시상을 떠올리는 것을 중요시했죠. 굉장히 고결한 정신입니다. 그 정신을 계속해서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지금까지 그 일에 치중해왔습니다.
해동경기원
중국 광동성과 경기도의 우호협력 발전과 교류를 위해 전통정원을 조성하는 현상 공모에 정영선이 이끄는 서안의 ‘경기별서(京畿別墅)’가 채택됐다. 결과적으로 광동성 광주시 월수공원에 8천5백 제곱미터 규모의 해동경기원이 2005년 12월에 조성됐다. 별서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인의 정신과 정취를 담아낸 별서는 광대한 중국 전통정원과는 다른 모습이다. 먼저 부지에서 생육된 커다란 나무들을 보존해 정원의 배경이 되는 큰 틀을 형성했다. 정원 작업은 노후화된 시설(폐쇄된 서유원)을 걷어내고 왜곡된 지형을 원래 자연 지형으로 회복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정원 초입에 마을의 수호신 솟대를 설치해 한국 정원의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가장 낮은 지역부터 바깥마당, 안마당, 정원 진입 공간, 주정(主庭), 후정(後庭)으로 전개되는 각 공간 사이는 숲에 의해 정원이 감춰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하면서 점진적으로 상승하도록 설계되었다. 연속되는 풍경 속에서 공간의 깊이는 더해지며 정점인 고지에 이르면 주변 풍광까지 끌어안는다. 주정의 주변은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어 정원 안팎의 풍경을 조화롭게 즐길 수 있다. 자연경관을 건축 속으로 끌어들여 활용하는 차경(借景)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성호정(성호 이익의 정신을 새긴 정자)과 네모난 형태의 연못인 방지(方池) 등은 한국 전통정원의 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해동경기원은 한국 정원의 내적 원리를 재현해 독특한 시적 운치를 담았다. 아름다운 공간에 머물고 거니는 것에 끝나지 않고 한국인의 전통적인 자연관과 사상, 생활사까지 총체적인 문화 체험을 지향했다.

정원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면서 잠시 빌려 쓰는 땅에 대한 헌사라고 생각합니다.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의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원다르마센터
정영선은 양평 자택 정원 구석구석을 몸소 다듬으며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삶을 추구해왔다. 그에 따르면, 삶의 터인 대지는 존중하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이기에 보살핌 자체가 곧 정원적 삶의 태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정신이 담긴 장소 중에 하나가 디자인 스튜디오 loci(박승진 대표)와 공동으로 조경설계를 담당한 뉴욕 원불교 원다르마센터다. 2012년 준공된 이곳은 4백26 에이커(약 52만 평)의 광활한 대지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건축물과 경관이 유기적으로 상생하는 가치를 고려했다. 선을 실천하는 종교 시설답게 명상과 수련을 위한 장소다. 미국 뉴욕의 클래버랙, 허드슨강 상류에 부지를 마련한 수련원을 위해 소박하면서도 성스러운 공간, 더욱이 위로와 안식을 찾는 이들을 보듬어줄 공간이 필요했다. 중요한 것은 대지의 가치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명상과 관련된 활동을 충족하는 동시에 자연 풍광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정영선은 식생을 연구하며 경관 계획과 조경 설계를 진행했고 지역 주민과 함께 과수를 재배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더불어 수련원의 자리와 자연에 최소한만 개입하는 길의 형태를 구상했다. 지역에 자생하는 식생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의 치유적 속성에 순응하는 행보는 자신의 정원이 만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기를 희망하는 정영선의 태도에서 나온다. 한편 4개의 주거용 건물과 명상홀로 이뤄진 센터를 설계한 HMA의 토머스 한라한은 한국 전통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ㅁ’자 마당을 유기적 공간으로 발전시켰다. 공백과 나선이라는 이중적인 개념을 건물에 활용했다. 지역의 특성을 살려 건축 소재로 나무를 사용했고 그린 에너지로 전기를 공급하는 식으로 자연과 융합되는 건물을 디자인했다.

시간과 계절이라는 개념은 조경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새벽과 이른 아침이 다르고 오전과 오후가 다르고 석양과 달밤이 다르죠. 무시로 변하는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어떤 순간이라도 감동하면서 자연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을 다스린다는 생각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정신이 있어야 자연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제주 오설록
정영선은 “땅을 읽고 그에 맞게 식물과 다른 정원 요소, 동선과 공간을 적절히 잘 구성하는 것이 정원 만들기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의 교과서적 작업이 제주 오설록이다. 서광다원의 차밭과 함께 차 문화를 소개하는 제주 오설록은 2001년 티뮤지엄 건립 이후 20여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티스톤, 이니스프리, 티테라스 등 주요 건물을 구축하며 확장해왔다. 정영선의 작업은 방문객의 수요를 반영한 마스터플랜 수립부터 함께했다. 기존 건물이나 환경과의 관계성을 단계적으로 구축하고 확장하는 더디고 섬세한 과정을 위해 조민석 건축가(매스스터디스)와의 유기적인 협업은 필수였다. 건축물이 들어선 후 건물과 제주의 독특한 경관이 서로 대화하듯 마주할 수 있는 정원을 디자인했다. 해안과는 떨어진 중산간 곶자왈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원식생의 상록활엽수를 전체적으로 배치했다. 대지 내 건물 사이로 높고 낮음이 변주되는 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을 밀도 있게 느낄 수 있는 산책로는 제주 오설록만의 자랑거리다. 광활한 녹차밭에서 내밀한 곶자왈 숲까지 다양한 방향에서 자연의 근경 혹은 원경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방문자들은 어느새 풍경의 일부가 된다. 벼룻돌을 떠올리게 하는 기둥 없는 캔틸레버 구조의 티스톤 주위에 왕벚나무, 해송처럼 큰 교목을 심어 건물 벽면에 그림자가 멋지게 드리우도록 연출했고 건물 뒤편은 곶자왈과 정원이 만나는 영역으로 작은 습지와 연못을 조성했다. 증축된 티뮤지엄의 중정 수공간에는 관목, 지피 초화와 수생식물을 심었다. 섬 전체 경관과 돌이 많은 땅의 조건을 읽고 이를 토대로 공간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건축과 조경의 면밀한 상생작용이 돋보인다. “자연의 끊임없는 변화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조명가의 사명”이라는 정영선의 신념을 확인할 수 있다.
※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9월 22일까지 진행된다.

전종혁은 정원 산책을 사랑한다. 정영선 선생님이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선유도공원을 시시때때 거닐며 시간의 힘에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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