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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사를 했다. 방의 쓰임새를 고민하다 책 감옥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꿈꾸던 일 아닌가. 꿈의 서재, 아니 책 감옥.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공간. 언제 들어왔는지 기억은 묘연하고 언제 나갈까 꿈꾸지도 않는, 시간이 단절된 출구 없는 감옥. 책 읽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이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줄 사람은 누굴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정순구 작가가 떠올랐다. 다행히 이 이상한 프로젝트에 그도 흥미를 보였다. 서재와 책 감옥을 구분하는 기준은 출입문. 열고 들어올 수 있지만 닫히면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운 ‘문 같지 않은 문’을 고민하고, 천장과 바닥을 책장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 하나의 나무 상자, 아니 한 채의 오두막 같은 구조를 구상했다. 합판만 50장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 책장을 이루는 합판이 가로세로로 빈틈없이 맞아야 하는 구조라 치밀한 설계와 시공이 필요했다. 2400×1200mm 합판 50장을 재단해 수백 조각으로 만들고, 하나하나 칠하고 샌딩하는 준비가 필요했다. “시공은 같이 해야 돼요.” 정순구 작가는 의뢰자가 시공에 참여해야 작품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물건이 된다고 했다. 수고롭지만 좋았다. 번거롭고 힘들지만 재미있었다. 덕분에 보이지 않는 면에도 시공의 디테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완성된 감옥에 책을 꽂고 천천히 살펴본다. ‘내가 이런 책을 읽었지’ ‘이런 책을 샀구나’. 전자책이 좋다지만 선뜻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책이 모였을 때 갖는 힘, 책등을 손으로 만지고 휘리릭 종이를 넘기는 느낌 때문이다. 안 읽은 책들이 눈에 띈다. 궁금하다. 읽고 싶어진다. 꺼내서 의자에 앉으면 된다. 특히 아끼는 책은 표지가 보이도록 세워둔다. 중간중간 좋아하는 소품도 넣어본다. 오래된 것과 작은 것은 공간의 밀도를 올려준다. 오래전에 사둔 파인애플 조명을 한 칸에 넣어본다. 한동안 쓰지 않던 향초도 가져온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고 위스키도 두어 병 가져다 놓는다. 맥주나 와인도 좋지만 여기엔 위스키다. 달달한 거 하나, 피트한 거 하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책장 밖에는 오래된 태엽 벽시계를 걸어두었다. 보기에도 좋지만 똑딱거리는 소리가 책 감옥에 울려 퍼질 때 아주 좋다. 이 소리가 싫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자연의 소리처럼 정겹다. 시간마다 종이 울린다. 두 시에는 두 번, 세 시에는 세 번, 열두 시엔 열두 번. 시계 소리가 똑딱똑딱 들리는 작은 책 감옥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책을 본다. 조만간 무거운 책과 함께 하루 이틀 내내 머물러볼까.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같은 책과 함께. 그렇게 다른 세상, 다른 시간 속에 잠기고 싶다.
장인성
브랜드 마케터. 〈마케터의 일〉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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