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m 규모의 회화 〈진실의 순간〉과 입구에 들어가기 전 설치된 벽화 〈소중한 삶을 위해〉,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니 단연 대형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전시를 구상할 때부터 가장 먼저 커다란 벽화를 상상했다. LA에서 나고 자라며 난 항상 야외에 설치된 예술작품과 벽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때문에 LA의 스피릿을 미술관 안으로 가져다 놓고 싶었다. 어떤 작품이든 도전할 기회가 있으면 난 주저하지 않고 잡는 편이다. 가로 35피트, 세로 14피트 크기의 〈진실의 순간〉은 내가 그린 가장 거대한 그림이다. 초안을 위해 캔버스 천 자체를 제작하는 일부터 고군분투했고, 보트 돛을 꿰매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공장에 의뢰해 천을 직조해낼 수 있었다. 또 손으로 일일이 그린 붓 터치를 살리고자 스튜디오 팀원들과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해내고자 하는 마음과 팀이 있다면, 엄청난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경험이었다.
아트 토이나 애니메이션 등 캐릭터를 좋아하는 이들은 특정 캐릭터 속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할 때가 많다. 멜로는 입 모양이 없는 단순한 생김새를 지녔는데. 멜로의 정확히 그런 생김새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감정과 경험을 이입하기 좋다고 판단했다. (환경 오염이나 팬데믹 같은) 아무리 주제가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을 다룰 때도 사람들은 작품 속에서 주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하고 작품에 접근하기 쉬운 경향을 띤다.
팬데믹 기간 동안 그린, 꽃으로 가득 찬 〈Stop to Smell the Flowers〉 시리즈를 포함해 대다수의 작품은 배경이 꽉 차 있는 경우가 많다. 작업 과정에서 처음부터 의도한 채 그리는 것인가, 아니면 그릴수록 점점 채워가는 것인가? 모든 작업은 연필과 종이 한 장으로 시작한다. 보통 아주 작은 섬네일이나 스케치를 그리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구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새 종이에 여러 번 다시 그린다. 이때 최종 작품에 대한 청사진을 얻고, 주로 무채색으로 작업을 이어간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듯한 느낌이 너무 좋다. 참고할 레퍼런스 없이 세상을 종이 위에 만들어내는 듯한 그 점이.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게 나올 때 내 그림들이 추상적이거나 혼란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꽤 계산되고 정돈돼 있다. 판화를 만드는 과정과도 매우 비슷하고, 유일무이한 하나의 작품을 치밀하게 만드려는 것이 예술 안에서 내가 추구하는 방식이다.
판화를 전공한 뒤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사이키델릭 아트의 선구자 빅터 모스코소(Victor Moscoso), ‘아이 러브 뉴욕’ 로고를 탄생시킨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 등 전설적 디자이너들에게 영향받았다고 수차례 언급해왔다. 순수 예술가와 상업 디자이너 사이에서 당신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나? 모스코소나 글레이저의 작품은 누가 만든지도 모른 채 정말 어릴 때 접했다. 자라면서 내내 미국 전역에서 그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예술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 그들의 천재성과 유산을 깨달으면서, 1970~80년대 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 손으로 그린 그림과 그래픽디자인이 혼합된 삽화 문화가 태동한 게 내겐 제일 크게 와닿은 사건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 그림 속에서 영혼을 들여다보는 법과 디자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동시에 깨우치게 되었다.
희망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당신의 작품을 보다가 ‘낙관은 의지’라던 어느 철학가의 말이 떠올랐다. 절망 속에서도 낙관을 잃지 않는 당신만의 비법이 있다면? 지금으로서는 그 질문이 바로 내가 내 그림을 통해 묻고자 하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그 답을 찾는 편이 내겐 더 빠를 것 같다. 당신의 말대로, 나는 삶의 낙관적인 측면을 더 보려는 경향의 사람이긴 하다. 삶에 희망이 없다면 살아갈 가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당신이 꿈꾸는 작업에 대한 판타지를 〈바자 아트〉 독자들에게 미리 들려준다면? 거대한 규모의 공공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다. 항상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동경해왔는데,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내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큰 요소 중 하나는 ‘접근성’이다. 예술과 디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 현대 예술의 범위 내에서 내 작품이 예술애호가 뿐만 아니라 길 건너편에 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개인에게도 닿을 수 있길 바란다.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나는 그게 내가 예술을 창조하는 어떤 목적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 ≪STEVEN HARRINGTON: STAY MELLO≫전은 7월 14일까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린다.
안서경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짐 필립스의 스케이트보드 도안과 스티븐 해링턴의 스케이트보드 시리즈를 비교해보며, 멜로와 룰루가 더 친밀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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